극단주의 세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국가와 집권여당 혹은 왕이 민중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은 비단 현대 민주주의 사회 뿐이 아니다. 농업 국가에서는 가뭄이나 기근도 왕의 덕이 부족한 탓으로 여겨졌으며, 이를 전근대적이라 할 수만은 없는 것이 현대 국가의 사건사고 또한 집권세력의 무능으로 책임이 전가되기 때문이다. 사실 집권세력도 억울한 면은 있다. 사고란 언제나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며, 설령 조짐이 보였다해도 그러한 적폐들은 현 집권세력이 권력을 잡기 훨씬 이전부터 쌓여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야 투명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만, 역사상 그런 사회가 존재하긴 했던가? 겉으로는 완벽해보여도 모든 사회는 저마다의 지병을 갖고있다. 잘생기고 키크고 돈잘벌고 착한 썸남이 알고보니 채찍을 좋아하는 변태성욕자였다든가...


물론 위기에 잘 대처하는 권력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 위기가 일개 국가 단위에서 해결될 수 없는 거대한 것이라면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바로 분노한 민중을 제어하는 것이다. 민중을 제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수단이 존재하는데, 제1은 총칼이요, 제2는 선전선동이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격언을 남긴 마오쩌둥은 그의 머리가 다 까벗겨질만큼 지독한 공산혁명의 과정에서 제1의 방안, 총칼의 효용성을 본능적으로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 포스팅에서 알아보았듯, 민족주의/국민개병제도가 정착한 이후부터 국가-군-국민은 정체성을 함께 하기 시작했다. 군인은 더 이상 직업적인 기사나 용병이 아니게 되었고, 민중 일반이 곧 군인인 세상이 도래했다. 농부 후안도, 로스팅하는 엠마도, 전시에는 후안 상병과 엠마 중위가 된다. 이는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서의 전쟁이 이전과는 비교도 불허할만큼 대규모화된 것 이외에 또다른 중요한 결과를 낳는다. 바로 민중을 등진 권력은 군부를 장악하기도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민중의 불만을 통제하는 제1의 기제인 총칼은 효용성이 사라지거나, 혹 효용성이 남아있다해도 단기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제2의 방안, 선전선동이 남게 된다. 그러나 이 선택지는 이미 집권하고 있는 세력이 채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민중의 분노는 현 집권세력을 겨냥하고 있을터, 무너져야만 하는 집권세력이 아무리 달콤한 레토릭으로 민중을 달래어도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다. 자, 이제부터는 정당성을 잃어버려 붕괴가 확정된 집권세력의 진공으로 다른 세력들이 치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바로 권력의 이동이다.

그렇다면 신생세력 중 민중의 분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아는 세력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맹점이다. 민주주의는 각 사회구성원의 이성을 통해서 유지될 수도 있지만, 각 사회구성원의 분노를 통해서도 너무나 잘 굴러간다. 분노한 민중들은 기존 체제를 수호하거나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세력을 선택지에서 제외한다. 더 자극적인 레토릭, 더 통큰 정책, 그리고 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가진 신생세력은 성장 포텐셜이 급증하고, 기성 정치세력은 반동으로 치부된다. 분노는 민중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극단적인 신생세력은 이내 권좌의 공백을 꿰찬다.

기성 집권세력과 모든 면에서 궤를 달리 하는 신생세력에, 민중은 자신들의 기대를 건다. 그리고 신생세력은 집권 초기부터 자신들의 공언을 관철하여, 민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기대가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확신해준다. 이제 민중의 분노는 신생세력과 혁명에 대한 기대로 치환되었고, 신생세력은 이 기대를 레버리지 삼아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다. 그 방법이란 것은, 반혁명분자들을 모조리 반동으로 몰아버리는 것이다.

민중의 분노는 반드시 사회의 소수 기득권이나 외세를 향해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국론이 분열된 상황이라면, 신생세력이 권좌에 오른다해도 권력을 독식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한바탕 내전이 발생한다. 그렇지 않고 민중의 분노가 소수나 외세에 향해있다면, 이제금 신생세력은 독재의 모멘텀을 확립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가 되었고, 독일 히틀러는 총통이 되었다.

파시즘에 대한 고찰


파시즘이라는 단어는, 고대 로마 시절 집정관 권력의 상징이었던 파스케스라는 도끼에서 유래되었다. 이제와 말하기도 새삼스럽지만 파시즘의 본질은 집단의 힘을 강조하는 데에 있으며, 전후 유럽 뿐 아니라 국가적 위기에 처한 거의 모든 국가들에서 항상 파시스트 세력이 등장하는 것은 민중의 "결집에 대한 요구" 때문이다. 따라서 파시즘은 그 근원에 마르크스주의가 있든 경제적 자유주의가 있든 주체사상이 있든, 다른 사상과 결합되기 무척 쉬운 성질을 가진다. 현실세계에서의 파시즘은 그 자체로서 어떤 근본가치를 추구하는 철학이라기보다는, 근원철학이 따로 존재하고 그 철학을 향해가는 일종의 혁명 방법론에 가깝다. 그래서 현실 속의 우리는 나치즘과 스탈린주의, 북한의 세습왕조를 모두 한 데 엮어 파시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을 떠나 책으로 돌아가자면 파시즘은 이런 사상이 아니었다.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와도 엄밀하게는 공존할 수 없다.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모두 굴레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인간의 궁극적 해방과 자유까지를 추구하지만, 전통적 파시즘은 한발 더 나아가 니체의 초인론을 끌어다온다. 초인론에 따르면 인간은 지상에서의 노예도덕에서 벗어나 초인적 이데아를 지향해야만 하며, 파시즘은 인간을 사회로 치환하여 국가가 나서서 초인(위버멘쉬)적 가치를 추구해야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실제 니체는 전체주의를 혐오했으며, 파시즘은 니체의 사상을 아전인수격으로 곡해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ps) 니체는 제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위 문단에서 잘못된 부분이 있거나 첨언할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댓글 부탁드립니다.

이제금 민중이 단결해야하는 이유는 설명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파시즘은 그 근원은 다를지라도 볼셰비즘의 대중주의와 닮은 구석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민중은 무엇을 위해 단결해야 하는가? 대체 그놈의 초인적 가치란 무엇인가? 실제로 이렇게 해결되지 않는 의문으로 인하여,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세력은 등장 초기만 해도 불평불만 가득한 동네 아재들의 집합소에 불과했다.

방법론으로서의 파시즘은 1차대전 이후 외세의 개입, 대공황, 불안정한 국내정치 등에 분노하고 있었던 민중을 사로잡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무엇을 기치로 삼아 이들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솔리니와 히틀러 입장에서도 이렇다할만한 답이 없었다. 그래서 이 두 작자는 파시즘의 깃발로써 베르사유 체제 혁파, 반유대주의, 그리고 핵심적으로 배타적 민족주의 내지 쇼비니즘을 내걸었다. 논리는 지극히 단순했다. 전통적인 파시즘이 확답하지 못한 초인적 가치에, 현실 정치가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국가의 노선을 대입했다.

이렇게 되면 일종의 순환논리가 된다. 파시즘에 따르면 민중은 결집해야 하고, 국가가 민중을 초인적 가치로 이끌어야한다. 그렇다면 그 초인적 가치란 무엇인가? 초인적 가치란 국가가 지정하는 바, 국가가 민중을 이끄는 행위 그 자체다. 이런 말도 안되는 논리전개는 파시즘이 하나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히틀러를 우상시하는 종교로 변질되는 데에 일조하였으며, 여기서조차도 교훈을 얻지 못한 스탈린과 김일성이 이 순환논리를 계승한다.

여하간에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파시즘의 순환논리 따위에 신경쓸 인간이었다면 애당초에 독재자로 집권하지도 못했다. 독일 국민들도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파시즘의 지향 같은 것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통치자보다는 화끈하고 목소리 큰 통치자가 더 나았다. 학교에서는 게르만인이 가장 똑똑하고 잘생긴 인종이며, 우리는 저 못생기고 미개한 놈들을 개화시켜야한다는 개소리를 가르쳤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때만 해도 이게 개소리라는 인식조차도 없었을테니까. 생각해보면 우리도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망까지 친 땅딸막하고 무능한 한 커피광 노인네를 황제랍시고 엎드려 절하지 않았나. 늘상 어제의 개소리가 오늘은 진리가 되고, 어제의 진리가 오늘의 개소리가 되는 것이 세상이다.

반유대주의의 근원


현대에 이르러서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의 상징 격이 되었지만, 반유대주의는 실상 유대민족이 디아스포라가 된 이후 전 유럽을 지배했던 유서깊은 혐오감정이다.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혀 살았던 것은 나치 치하가 아니라 중세 유럽이었으며,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장 훨씬 이전부터 러시아와 유럽 각국, 심지어는 중국 송나라까지 유대인을 학살한 역사가 있다.


이토록 뿌리깊은 반유대주의는 사실 나치가 이를 외칠 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당연한 감정이었다. 그 혐오의 근원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혹자는 유대민족이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이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건 교회의 설명일 뿐, 막상 예수와 사도들도 유대인이 아니었던가? 저먼 옛날부터 유대인들은 유럽 전역에 퍼져 살았으며, 차별을 피해 저마다의 소공동체를 조직하여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다. 서슬퍼런 유럽 교회 치하에서, 예수를 부정하는 유대교를 믿는 유대민족은 농업에조차 종사하지 못했다. 차별받던 유대인들은 믿을 것이 금전뿐이라는 생각이 강해졌고, 생계를 위해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 이로 인해 우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듯 유대인들이란 돈만 밝히는 족속이라는 편견이 생겼고, 현대의 유대자본 음모론 또한 이 시기의 유대인 혐오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치가 반유대 감정을 조장한 것은, 당시로서는 비교적 현명한 편이었다. 원체 반유대주의가 유럽 전체에 퍼져있다보니 다른 국가를 자극할 일도 없었고, 또한 독일 국내 소수 유대인들에게 민중의 분노를 집중시킴으로써 내부결속의 효과도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적의 적은 동지인 법이라, 이미 교회의 권력이 사라진 20세기 초반부터 영국은 유대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이것은 1차대전부터 시작된 것이며, 발포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독립 유대국가를 마련해주겠다는 것이 영국의 약속이었다.

유대인 학살 자체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 학살 하면 곧바로 나치 독일부터 떠올리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 나치가 유대인을 대거 학살하는 삽질을 해주는 바람에 똑같이 유대인을 혐오했던 연합국은 전후 윤리적 이니셔티브를 갖고 선비 행세를 할 수 있었다. 명심해야할 것은, 이놈들도 원래 죄다 나치와 똑같은 놈들이었다는 것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선과 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그것은 악을 어떻게 포장하여 선으로 바꾸는지에 관한 레토릭의 문제에 가깝다. 그러나 국가는 동맹국을 끌어들이고, 세계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언제나 윤리적 이니셔티브를 선점해야할 필요가 있다. 독일은 1차대전에서나 2차대전에서나 이 윤리적 이니셔티브를 놓치는 패착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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