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을 끝내는 방법

싸움을 끝내는 방법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두 여인의 피터지는 싸움을 떠올려보자. 승자는 쿨하게 패자를 일으켜 괜찮냐고 묻고 깽값을 물어주며 훈훈하게 싸움을 마무리할 수 있다. 반면 다시는 자신에게 도전하지 못하도록 패자의 눈을 뽑고 팔다리를 완전히 부러뜨려 놓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승자는 패자에게 확실한 조치를 취해야만 향후의 또다른 싸움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전쟁 못지 않게 전후처리도 중요한 이유이다. 결국 내가 이번 시리즈의 포스팅 제목들을 마치 드라마 다루듯 시즌1, 커머셜타임, 시즌2로 쓴 것도, 1차대전의 부실하기 그지없는 전후처리가 2차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양차 세계대전이 서로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면, 아마도 각 전쟁의 네이밍은 지금과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자, 이제 우리는 2차대전 발발에 관한 논의를 함에 있어서, 지금껏 우리를 지배해온 대공황 담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대공황은 촉매일 뿐 그 자체로서 전쟁의 원인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민족주의가 발흥한 국가에 대한 전후처리는 더욱 섬세해야만 한다. 민족주의 이전까지만 해도, 국가 간 투쟁이 발생하고 권력이 교체되어도 일반 민중 입장에서는 단순히 기억해야할 왕의 이름만 바뀔 뿐 생활이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일반 민중이 국가와 자신의 정체성을 나란히 놓는다는 점에서 이전의 패러다임과는 크게 달랐으며, 외부세력이 들어올 경우의 저항도 거세어졌다. 따라서 승전국은 전쟁과는 별도로 전후 패전국의 국민들에 대해 어떠한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으며, 이는 국가들이 영토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했다.


베르사유 체제의 개막



라인강 서부 : 마침내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며 전쟁은 막을 내렸고, 독일군은 알자스-로렌 지역(보불전쟁에서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빼앗은 철광석 산지. 프랑스 지역 철광석 생산량의 90%를 차지했다.)과 라인강 서부 지역으로부터 철수한다. 철수한 독일군의 자리는 미군과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점령한다. 해당 지역은 독일 산업의 중심일 뿐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프랑스가 이 지역을 틀어쥐고 있는다면, 향후 독일이 슐리펜 계획에서와 같이 벨/네/룩을 우회하여 프랑스로 진격하는 것을 방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여차하면 독일 본토로의 진격 또한 용이한 바였다.


파리평화회담 : 독일의 전후처리를 두고 승전 연합5개국 영/프/이/미/일(일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서술하기로 한다.)이 파리평화회담을 개최한다. 이 회담에는 개최 시점부터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분노가 서려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후 빈 체제는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서 그렇게 깽판을 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측 대표 탈레랑을 초청한 데에 반해, 파리평화회담에서는 패전국 독일의 발언권을 아예 배제했다는 점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프랑스는 보불전쟁 패배 당시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굴욕적인 항복 문서를 작성했던 기억을 떠올려, 회담 장소를 똑같은 궁전 똑같은 방으로 정했다. 또한 여기에는 볼셰비키 러시아의 사절단도 초청되지 못했는데, 이는 단독강화로 먼저 발을 뺀 러시아에 대한 연합국의 배신감과 볼셰비키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감에 의한 것이었다.


이 회담에서 최종적으로 체결된 조약이 베르사유 조약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i) 알자스-로렌 지역을 프랑스에 반환 : 어차피 프랑스 영토였던걸 보불전쟁에서 빼앗은거니 독일은 그러려니 했다.


ii) 벨기에의 독립국 지위 보장 : 다시는 독일이 슐리펜 계획 같은 침공 작전을 마련하지 못하도록 하는 바. 동시에 영국의 세력권을 지키려는 목적도 있다.


iii) 프랑스의 자르Saar 지역 관리 :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 단, 프랑스가 합병한 것은 아니었고, 명목상 15년 후 자르의 귀속여부에 대한 주민투표가 실시될 예정이었다.


iv) 라인강 서부에 연합군 주둔 : 위에서 언급했듯, 이 지역에 대한 점령은 독일의 침공루트를 방어함과 동시에 독일에 대한 선제공격이 가능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v) 라인강 동서부 50km 구간을 비무장지대로 설정


vi) 폴란드는 포즈난 주(前 서프러시아)와 단치히 회랑Polish Corridor 획득 : 폴란드는 원래 러시아의 세력권이었으나, 러시아가 혁명으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고, 겸사겸사 연합국들도 독일 동부의 포위를 위해 말 잘듣는 동유럽 국가가 필요했으므로 독립한다. 연합국은 폴란드 덩치를 키워줌으로써 독일이 동부로 팽창할 수 있는 여지를 막고자 했다.


vii) 단치히는 자유시로 만들어 폴란드 관리 하로 편입


viii) 독일의 해외 식민지는 모두 벨기에/영/프/일에 분할 : 승전국들이 외쳤던 민족자결주의가 얼마나 헛소리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바. 민족자결주의는 결국 패전국의 식민지를 승전국끼리 나눠먹고, 혹 나눠먹지 못한 것도 패전국에게 다시 주기 아까우니 독립이나 시키자는 연합국들의 레토릭이었다.


ix) 독일의 무장해제 : 독일군 병력은 10만명으로 제한하고, 잠수함과 공군의 보유를 금지시켰다. 뭐 히틀러는 요리조리 잘 피해서 V-1, V-2 로켓무기를 개발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x) 독일에 전쟁배상금 부과 : 배상금은 전후 독일을 무너뜨리는 데에 확실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유럽 경제도 확실히 무너졌다. 이후 대공황이 발생하여 독일이 붕괴 직전까지 몰리게 되자 연합국은 서둘러 대독 배상금을 삭감해주지만, 이미 돌아서버린 독일 국민이 연합국에 대한 분노를 거두기에는 이미 늦었다.


사실 연합국 모두가 합의한 바가 이렇고, 이 자체로도 독일이 느끼기에는 충분히 빡센 조약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포스팅의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빡세려면 아주 빡세서 독일이라는 국가를 갈기갈기 쪼개놨어야 했다. 독일이라는 국가를 유지하면서 불필요하게 가혹한 군사/경제 제재를 가하는 것은, 전쟁 한 번 졌다고 사그라들 수가 없었던 독일 민족주의를 다시 한 번 자극하게 된다. 위의 두 여인 예시를 들자면, 승자가 패자의 눈을 뽑지도 팔다리를 부러뜨리지도 않아놓고서, 자신의 구두를 한 번 핥아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분명 패전국은 엄청나게 굴욕적이겠지만, 독일은 이 정도로 무너질 국가는 아니었다. 식민지 경제에 의존했던 영/프와는 달리 독일은 유럽 최대의 인구를 가진 내수시장이 탄탄히 남아있었고, 첨단 기술로 무장하고 있었다. 독일이 한 차례의 패전 이후에도 30년만에 또다시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바로 미루어 볼 때, 심장을 단칼에 도려내지 않고 여기저기 기스만 내놓는 것으로는 오히려 거인을 열받게 하는 데에만 일조했을 뿐이다. 결국 베르사유 체제에서 실패한 대독일정책이 또 다른 세계대전으로 이어지자, 2차대전 이후 연합국은 독일을 동서독으로 분할하게 된다.


대독 강경론이 아예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보불전쟁과 1차대전 시 독일에 의해 크나큰 인적/물적 손실을 입은 프랑스는 아예 독일의 재기 가능성을 분쇄하고자 했다. 프랑스는 라인강 유역에 독립 공화국을 세워 프랑스-독일 국경 사이에 완충지대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동프러시아의 독립, 자르 지역 병합 등을 주장하며 독일을 확실히 부수어 놓을 것을 연합국 측에 요청한다. 감정적으로 보이는 프랑스의 정책이 결과론적으로는 더 효용성이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인지라, 독일이 없어지면 평화로울 줄로만 알았던 유럽에는 새로운 공공의 적이 나타났으니, 볼셰비키 러시아였다. 겉으로나마 강대해보였던 제정 러시아가 순식간에 붕괴하는 꼴을 목도한 연합국들은 유럽 본토에서 제2의 볼셰비키가 등장하는 것을 극도로 견제했다. 만약 독일에 대해 프랑스의 주장대로 지나치게 가혹한 (저 정도로도 가혹하다만) 조치를 취했다가는 독일에서도 볼셰비키가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된 연합국들에 또한 그 불똥이 튀게될 것임이 자명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연합국은 독일의 재기를 견제해야한다는 목적 이외에도, 독일을 적당히 이용하여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방파제로 삼을 필요성이 있었고, 따라서 독일이라는 국가를 아예 회떠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연합국은 프랑스에게 자제를 촉구하고 상기한 베르사유 조약대로 전후질서는 재편된다.


1차대전 후 각국의 이해득실



1919년 전후질서의 큰 그림이 나왔을 때에, 각국은 비로소 이해득실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i) 프랑스 : 알자스-로렌과 자르의 획득으로 프랑스는 독일의 목덜미를 움켜쥐는 데에 성공한다. 이에 더해 아프리카/중동 지역에서의 식민지를 확장하였고, 독일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국내 경제를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러시아-프랑스 동맹이 끊기게 되자, 프랑스는 독일을 홀로 견제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영/미 측에 방어동맹을 체결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지만, 더 이상 머리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영/미에 의해 끊임없이 거절당한다.


ii) 영국 : 영-독 간 해군경쟁이 사라지면서 유럽의 제해권은 잡았으되, 1차대전 사이 미국과 일본이 급성장하며 새로운 경쟁상대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독일이 영국의 경쟁상대이긴 했어도, 동시에 가장 거대한 수출시장이기도 했는데 독일이 패전하며 이러한 이점이 사라진다.


iii) 러시아 : 러시아는 전후처리고 뭐고 이래저래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볼셰비키는 혁명 이후 반대파들과 적백내전에 돌입하였고, 볼셰비키를 견제하고자 하는 연합국들이 백군에 가담하면서 장대한 세계혁명의 목표는 접기로 한다. 1930년대 중반까지 러시아는 준고립주의적인 외교정책을 펼친다.


iv) 이탈리아 : 이탈리아는 영국으로부터 1차대전의 참전 대가로 약속받았던 영토를 충분히 받아내지 못했다고 불만이 가득했다. 이는 모순적이게도 승전국이었던 이탈리아가 독일과 같은 수정주의 국가화되는 데에 일조한다.


v) 오스트리아 : 사요나라. ㅃㅃ2.


vi) 미국 : 1차대전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국가로 등극했지만, 여전히 미국 내 여론은 유럽 문제 개입에 반대했다. 이는 1차대전의 양상으로 미루어보아 "쟤들 싸움에 끼어들었다가는 우리가 치루어야할 비용도 막대하다"는 이해득실에 의한 것으로, 고립주의 외교정책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미국은 막상 자기들의 대통령이 제안하여 창설하게 된 국제연맹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윌슨주의의 대두 : 윌슨은 전후 처리에 대하여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다. 민족은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할 권리가 있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사상에 일관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민족자결주의를 통해 수많은 발칸 국가들(이전에는 오스만과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이 독립했지만, 정작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는 독립하지 못했다. 또한 유럽에서도 민족자결주의의 예외가 존재했는데, 가장 중요한 예외가 폴란드 단치히와 단치히 회랑,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Sudeten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게르만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민족자결주의에 따르자면 독일이 이 지역들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독일과 볼셰비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연합국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덩치를 키워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모순이 발생한다. 30여년이 흐른 후, 우습게도 히틀러는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며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를 침공해 2차대전의 서막을 연다.


새로운 적, 볼셰비키의 등장

적백내전 : 한편 러시아는 말그대로 개판 오분 전이었다. 사회주의, 자유주의, 왕당파, 소수민족 독립운동가 등이 한데 섞여 이루어진 백군은 볼셰비키의 적군과 내전에 돌입한다. 백군 측에는 영/프/일/미도 가담하는데, 영국/프랑스는 폴란드의 성장을 돕기 위해(폴란드와 러시아도 적대관계였다.), 일본은 만주지역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미국은 걍 일본이 참전하니까 견제할 겸(...) 참전한다. 볼셰비키는 차르 치하의 영토를 소작농에게 분배해주고,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패배하면 이 땅을 모두 저 뚱뚱한 부르주아놈들에게 빼앗길 것이라 선동하며 인민의 지지를 이끌어낸다. 또한 트로츠키는 적군 조직을 정비하고 징병제를 실시함으로써 볼셰비키가 승기를 잡는 데에 일조한다. 결과적으로 볼셰비키 적군이 승리하고, 러시아에서는 소련 정부가 수립된다.


소련은 혁명 직후 상실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을 수복하고 신경제정책NEP를 펼쳐 피폐화된 소련 경제를 재건하는 데에 주력한다. 그러나 1924년 레닌이 사망하며 또 다시 소련 권력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스탈린이 집권함으로써 재빠르게 해결되었는데, 여전히 세계혁명을 부르짖는 몽상가 트로츠키보다는, 소련의 1국사회주의를 우선시하는 스탈린이 좀더 현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이 세계혁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고,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을 조직하여 각국 공산당과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한다.


프랑스-동유럽 방어동맹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 1차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폴란드는 러시아에 넘어간 몰락한 왕국이었다. 그러나 전쟁 직후, 연합국에 있어서 독일과 소련을 견제하는 데에 폴란드만한 동반자가 없었고, 이에 연합국은 폴란드를 적극 지원한다. 한편 폴란드는 독일에게보다는 러시아에 더 큰 적개심을 갖고 있었는데, 1920년 소련이 내전에 빠진 틈을 타 소련을 침공하기도 한다. 물론 바르샤바까지 몰려 항복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후의 소련-폴란드 국력 차이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놀라운 일. 체코슬로바키아 또한 독일땅 부스러기를 신나게 주워먹으며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에 성공한다.


프랑스의 동유럽 매수 : 사실 연합국 연합국 해도, 독일 문제에 있어 가장 아쉽고 답답한 당사국은 프랑스였다. 영국과 미국이야 또다시 전쟁이 일어난다해도 신경끄고 제해권 유지에만 힘쓰면 될 일이었고, 소련도 혁명의 과정에서 독일의 도움을 받은 바가 있었다. 차기 전쟁에서도 프랑스가 독일의 희생양이 될 것임은 너무나도 뻔했다. 프랑스는 계속해서 미국 측에 방어동맹 체결을 촉구하지만 유럽의 안보부담을 떠안기 싫었던 미국은 이를 계속 거절, 영국도 미국이 안하면 우리도 안한다며 거절한다. 이에 프랑스는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의 동유럽 국가들과 방어동맹을 체결하는 데에 주력한다. 이로써 독일을 양면포위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좋았겠으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프랑스-동유럽 간 방어동맹은 다름아닌 동맹을 주도했던 프랑스 본국의 뻘짓으로 끝장난다. 프랑스가 이 동맹체제를 체결한 것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동유럽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지, 독일이 동유럽을 침공했을 때 프랑스가 휘말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후에 히틀러는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동유럽부터 정리하는데, 이는 고스란히 프랑스의 안보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더욱이 프랑스의 마지노선 건설은 동유럽의 안보불안감을 가중시켰고, 실제로 히틀러가 미쳐날뛰기 시작할 때에도 피보기 싫었던 영/프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그 불안감은 현실화된다.


대독 배상금 문제

배상금 문제는 파리평화회담에서 논의가 끝나지 못했고, 따로 배상금 위원회를 조직한 이후에서야 해결된다. 이 배상금 위원회에 참여했던 학자 중 한 명이, 후에 케인스주의로 유명해지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이다. 케인스를 비롯한 각국의 배상금 위원회 대표들은 프랑스가 제시한 대독배상금이 지불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워낙에 프랑스가 똥고집을 피워대는 통에 이렇다할만한 반박은 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배상금을 삭감하는 대신 미-프 방어동맹을 체결하자고 은근슬쩍 추파를 던졌지만, 미국은 차라리 독일에게 무리한 배상금을 물리는 편이 향후 유럽 문제에 휘말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제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프랑스가 뗑깡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독-소 라팔로 조약 : 그러던 중 1922년, 연합국 입장에서는 경악할만한 일이 발생한다. 1차대전 이후 줄곧 외교현장에서 소외되어 왔던 독일과 소련이 연합국의 시선을 피해 밀회를 가졌던 것이다. 양국이 밀회를 가진 이유는 소련은 제정 러시아 시절의 부채를 모두 무효화하고 싶어했고, 독일은 배상금 문제에 있어서 소련이 프랑스 편을 들까바와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뭐 조약의 내용 자체야 별 볼일이 없었지만, 연합국은 독일의 기술력과 소련의 자원이 합쳐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며 즉각 양국에 제재를 가한다. 특히 프랑스는 이 사건에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독일도 프랑스에 대한 항의 겸 배상금 지급을 중지하기에 이른다. 원체 배상금에 별 미련이 없던 영/미가 대독 배상금 문제에 대해 프랑스 측이 알아서 받으라며 미온적으로 나오자, 프랑스는 정말 알아서 받기 위해 독일의 산업지대인 루르를 점령한다. 여담이지만 프랑스의 이 루르 점령에 반발해, 독일 내에서 맥주홀 폭동 사건을 일으켰던 주범 중 하나가 아돌프 히틀러였다.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배상금 삭감 : 여하튼 과도한 배상금 문제에 대해 독일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바로 돈을 찍어내는 것. 그마저도 부족하면? 돈을 더 많이 찍어내는 것. 배상금 지급을 위해 독일은 엄청난 마르크화를 찍어내기 시작했고, 이는 마르크화 가치의 폭락과 초인플레이션을 야기한다. 이로써 독일 경제도 유럽 경제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으며, 독일 신임 수상 구스타프 스트레제만은 일단 프랑스로의 배상금 상환을 재개하며 위기 탈출을 꾀한다. 프랑스 또한 독일의 경제난으로 인한 피해를 직접 입고 있었기 때문에 스트레제만의 협조를 환영하게 된다.


스트레제만 독일 정부는 먼저 종이쪼가리만도 못해진 자국의 화폐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독일의 내수시장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던 유럽 각국들도 전쟁일랑 잊고 독일 경제재건에 협조하기 시작한다. 마침 프랑스에서도 대독 강경론자였던 레몽 푸앙카레가 실각하고 에두아르 에리오가 집권, 독일 루르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물린다. 연합국은 도즈 플랜(1924)을 통해 독일 측의 배상금 상환을 일시유예하고 차관을 제공한다.


로카르노 조약 : 그러나 프랑스가 루르를 점령한 일은 또 나름대로의 안보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독일에게는 무척 위협적이었다. 이에 독일은 연합국 측에 서부국경(벨기에-프랑스-독일)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고, 영국 네빌 체임벌린 수상과 프랑스 에두아르 에리오 수상도 이에 찬성하여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된다. 이때 독일은 국제연맹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뭐 쓸모없는 일이지만서도... 영/프는 사실 이때부터 독일의 남아있는 야심을 눈치챘어야 했다. 영/프는 독일 측에 서부국경을 보장할 겸 동부국경도 보장해버리자고 제안했는데, 독일이 이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영/프도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이, 독일이 계속 이렇게 착실한 패배자로 남아준다면 향후 소련 견제를 위한 방파제로서의 이용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영 플랜 : 도즈 플랜을 문제없이 수용하고 착실히 이행했던 스트레제만 독일 정부는, "지금껏 말 잘들었으니 배상금도 좀 깎아주시고 공장 좀 짓게 라인강 주둔 연합군님들 철수 좀 해주시졈" 하고 요청한다. 이 때도 프랑스는 영/미가 방어동맹을 체결해주어야만 라인강 유역에서 철수하겠다고 뻗댔지만, 이미 프랑스가 똥고집을 부릴 것을 예상했던 영국이 선수쳐서 라인강 유역에서 군대를 빼버림으로써 프랑스도 별 수 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저항감이었다. 도즈 플랜과 영 플랜으로 (연합국 입장에서는) 배상금을 대폭 삭감하고 지불만기를 1960년대까지 늘려주었지만, 막상 독일 국민은 "뭐? 1960년대? 미친 우리 손자또래까지 배상금 갚아야됨?" 하며 연합국에 대한 불만감을 표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마지노선 이야기



프랑스의 마지노선 : 그리고 중요한 것은, 로카르노 조약과 영 플랜/도즈 플랜으로 인하여 지금껏 베르사유 체제를 견인해왔던 프랑스의 외교적 입지가 크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이제 프랑스는 받아낼 배상금도 마땅치 않았고, 라인강 유역에서 군대조차 철수했으며, 그렇다해서 영/미와 방어동맹을 체결하는 데에 성공했느냐 하면 잠시 눈물 좀 닦고... 대독정책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상실한 이 시기부터 히틀러 시기에 이를 때까지 프랑스는 또 다시 독일에 질질 끌려다니는 볼모 신세로 전락한다. 이에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은, 그래! 만리장성을 쌓으면 되겠다!


사실 마지노선이라 하면 흔히 프랑스의 뻘짓이라고 많이들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나치 독일이 마지노선을 피해 벨기에 방면으로 침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상황, 어딘가 많이 낯이 익다. 벨기에 방면으로 침공하는 계획은 이미 독일이 1차대전 때 슐리펜 계획으로 실행했던 바다. 프랑스가 그걸 몰랐을 리는 없었다. 마지노선의 보다 더 중차대한 역할은 길고긴 요새선으로 프랑스-독일 국경을 봉쇄하여, 독일의 침공루트 자체를 벨기에로 고정하기 것이었다. 즉, 벨기에 이외의 기상천외한 다른 곳으로 침공할 여지를 막은 것. 또한 마지노선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때에, 벨기에 방면을 거칠 수밖에 없게 함으로써 영국 참전의 빌미로 삼을 수도 있었다. 프랑스는 차기 전쟁도 1차대전과 정확히 똑같은 양상으로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주력부대를 벨기에 방면에 배치하였으며, 독일이 1차대전 때처럼 또 다시 벨기에 루트로 쳐들어오는 것은 프랑스가 제발 좀 그렇게 해주기만을 바라는 바였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프랑스의 판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결국 나치 독일도 벨기에 방면으로 프랑스에 진입했으니까. 그러나 프랑스는 미래 전황을 아주 잘못 읽고 있었다. 1차대전의 그늘에서 미처 헤어나오지 못한 프랑스는 차기 전쟁 또한 참호/방어전으로 진행될 것이라 예상했다. 따라서 벨기에 방면 독일군의 진격 속도도 느릴 것이고, 프랑스는 "벨기에 쪽은 적당히 막아내고 마지노선만 제대로 지켜내자! 그래 전쟁에 승리할 것이다" 하는 착각 속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2차대전이 발발하여 막상 벨기에 방면으로 치고 들어온 것은 다름아닌 기동력에 중점을 둔 독일군 기갑부대였고, 참호/방어전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독일 기갑부대는 프랑스군의 폐부와 심부를 마음껏 헤집어 놓았고, 지휘부를 중점적으로 타격당한 프랑스군이 와해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리는 단 6주만에 함락당하고, 아돌프 히틀러는 에펠탑 앞에서 자신의 졸개들과 인증샷을 찍게 된다.


또한 마지노선의 건설은 정치적 하자를 갖고 있었는데, 바로 동유럽의 프랑스에 대한 불신감 조장이다. 독일을 양면포위하기 위해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과 적극적으로 방어동맹을 체결했던 프랑스였지만, 결국 그 방어동맹의 본질은 프랑스의 방위에 있었다. 동유럽은 향후 독일이 동유럽 침공 시, 프랑스가 동유럽을 도와주기는커녕 마지노선 안에만 틀어박혀 자국방위에만 집착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와 폴란드 침공으로 정확히 들어맞게 된다.


대공황과 히틀러의 대두



대공황 : 자, 이제서야 우리가 흔히 2차대전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발 대공황이다. 도즈 플랜과 영 플랜으로 고리 외채를 수혈받은 독일 입장에서 대공황은 특히 더 치명적이었는데, 그렇잖아도 불안정했던 독일 내부에서는 이제금 극우/극좌 세력이 의회 의석을 나눠먹기 시작한다. 위급해진 독일 정부와 연합국 정부는 이제는 아예 독일의 배상금을 면제하고, 독일과 자국 내 극단주의 혁명을 막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나치의 득세 : 그러나 대공황이 발생하고 난립하기 시작한 극단주의 세력은 독일 정부의 통제 범위 바깥에 있었다. 나치당은 기존 기독교에서는 반유대주의, 공산주의에서는 대중주의, 범게르만주의에서는 독일 민족주의를 차용하여 세 불리기에 몰입한다. 이 때문에 1928년에는 12석을 차지하는 데에 그쳤던 나치당이 1930년 총선에서는 제1야당으로, 1932년 총선에서는 집권여당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1933년 히틀러와 나치는 의회를 해산하고 수권법을 통과시켜 반대 당을 모조리 금지시키는 데에 이른다. 이는 오히려 당시 정국불안에 위기감을 느끼던 독일 국민들의 환영을 받게 된다.


히틀러 개인사와 그의 정치인생에 대해서는 여기에서는 길게 언급하지 않도록 한다. 그러나 명심해야할 것은, 히틀러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극악무도한 악당이 아니라, 당시 독일 국민들의 분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알았던 한 명의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설령 그 시기에 히틀러가 없었다해도 독일은 분명 극단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을 것이며, 그 자리에 반드시 하겐크로이츠를 매달고 있는 콧수염 화가가 있을 절대적인 운명 따위는 없었다. 누가 악마가 되는가? 악마에겐 날개도, 검은 창도 필요하지 않다. 분노한 대중들의 영웅이 곧 악마이다. 이 때문에 2차대전을 설명함에 있어서 히틀러에 이목을 집중하는 것은 수많은 비약을 낳을 수밖에 없다.


히틀러라는 인물은 이제와 독재와 전체주의의 화신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그가 권좌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민주적이었다는 바이마르 헌법이 있었다. 이는 2차대전 이후, 독일 지도부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까지도 심정적인 죄책감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나치의 등장에 사죄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영화 <몰락>에서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밀고 들어오자 나치 선전선동부 장관 괴벨스가 하는 대사에 이 내용의 본질이 담겨있다. "나는 저들(독일 국민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아. 동정할 이유가 없지. 그들이 직접 선택한 운명이니까. 누가 강요하지도 않은 그들의 선택이었어. 그리고 이제 그 대가를 치루는 것일 뿐이야." 이 주제에 관해서는 필자 블로그 http://aceferr.tistory.com/143를 참조해도 좋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