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와 뻘짓 사이에서

역사를 논함에 있어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이 격언을 싫어한다. 돌이킬 수 없는 사건에 갖가지 가정을 섞어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그저 결과론적으로 사건을 배치하는 데에 그친다면 우리는 배울 것이 없다. 지금에 이르러 실책이나 오판으로 여겨지는 역사상 정책결정자들의 판단들은 나름대로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합리성의 발로이지만, 분명 선택의 상황은 늘 존재했다. 그 선택을 한번쯤 비틀어서, 아예 새롭게 흘러갔을 세상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진정한 재미이고 가치다. 또한 단순한 연표가 아닌 그러한 비현실적인 가정들이야말로 현대의 정책결정자들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명한 의사결정을 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나치 독일, 파쇼 이탈리아,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알아보았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충분히 강경하지도, 그렇다고 유화적이지도 않았던 애매한 1차대전의 전후처리였으며, 그에 대공황이라는 사건이 기름을 끼얹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볼셰비즘 혁명의 위기를 맞게된 연합국은 독일의 폭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외려 독일의 분노어린 민족주의만 잔뜩 부풀려 두었다.

그러나 만약, 연합국이 국내정치에 연연하지 않고 히틀러의 폭주를 막았다면 어땠을까? 뒤늦게라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와 폴란드 침공을 감행하는 즉시 독일 본토로 치고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또 다시 양면전선을 맞게 되었을 나치 독일이 그래도 전 유럽을 석권할 수 있었을까? 나아가 나치 독일을 조기진압했다면, 핵무기는 개발되지 않았을까? 2차대전은, 어쩌면 시즌1에서 마무리만 잘 지어놨어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재앙이었다. 전후 체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포스트 나폴레옹 빈 체제 정도만 되었어도 독일을 자극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이제와 연합국의 삽질이라고 여겨지는 외교적 결정들이 과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 순전히 뻘짓을 한 것인지에 관한 내용이다.

독일의 재기


히틀러의 군부 흡수 : 히틀러는
 독일 민중의 지지를 독식했고, 그렇잖아도 베르사유 체제 내 군비제한에 불만이 많았던 군부의 인기까지 얻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1차대전에서 패하긴 했어도 지난 세월 간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등 크고 작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군부가 이제야 정치권에 모습을 비치기 시작한 루키인 히틀러에게 지속적인 지지를 보낼지는 의문이었다. 또한 독일 내 군대 체제는 히틀러로 인해 개판이 되어 있었는데, 정규군인 독일 국방군 이외에 히틀러의 돌격대(SA, 이후 친위대 SS의 전신 격)가 따로 존재하고 있었다. 즉, 독일의 무력은 독점이 아닌 양점되어 있었고, 이 상황에서 국방군과 히틀러는 크든 작든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군부는 히틀러가 영/프를 지나치게 자극하기 시작하자, 아직 전쟁 준비가 다 되지 않았다며 히틀러를 설득하고 나선다. 이에 나치는 장검의 밤 사건(1934년)과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을 통해 독일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하게 얻는다.

1930년대 독일의 포위망 : 히틀러가 절대권력을 획득한 1933년 당시 독일은 완전한 포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로카르노 조약(1925년) 계약서를 들고있는 서슬퍼런 프랑스가 도끼눈을 뜨고 서부전선에 도사리고 있었고, 동부로는 프랑스의 방어동맹국인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가 포진해 있었다. 북해와 지중해의 제해권은 영국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소련마저도 히틀러가 노골적인 반공주의 노선을 타기 시작하자 프랑스와 동맹협상에 들어간다.

대독 포위망에는 녹이 슬고 : 그러나 나치는 굳건해보이는 대독 포위망이 이미 녹슬대로 녹슬어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물론 대외적으로야 독일이 문제였겠지만, 대공황에 시달리던 연합국 지도자들은 당장 자기 정치생명조차 부지하기 힘든지라 국외정책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누차 말하는 바이지만, 히틀러가 마수를 뻗기 이전인 193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연합국 지도자들이 극히 꺼렸던 것은 바로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자신들이 틀어막을대로 틀어막은 (최소한 자기들끼리는 그렇게 생각했던) 독일이 또 다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독일이 다소 막 나간다고 해도 당근 좀 던져주면 알아서 먹고 떨어지겠지 하는 안일한 사고가 연합국들을 지배했다. 그토록이나 독일에 강경했던 프랑스조차도 마지노선 건설 이후에는 제 땅에 틀어박혀 방어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차대전은 그만큼 강대국들이 치를 떨 정도로 지독한 살육전이었으며, 1차대전이 끝난 지 20년밖에 흐르지 않은 이 시점에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독일의 재무장 선언 : 이러한 상황을 나치는 십분 활용했다. 나치 독일은 1933년 베르사유 조약과 군비제한에 관한 모든 사항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그리고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 뭐 이것도 별 필요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이윽고 1935년, 베르사유 조약 당시 프랑스 관할로 넘어갔던 자르Saar 지역에서 예정되었던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원체 게르만인이 다수였던 지역이니 연합국들도 어차피 이 선거에서 독일이 이길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문제는 나치의 득표율이었다. 90%가 넘는 독일 귀속 찬성률은 연합국으로 하여금 나치의 무서움을 새삼 다시 깨닫게 하는 바였다. 위기감을 느낀 연합국이 이때 곧장 독일을 견제했다면 2차대전은 좀더 미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르를 병합하고나서도 연합국 측에서 아무런 대처가 없자, 히틀러는 1935년 3월,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한다.

스트레사 체제 :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전쟁의 기운을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독일과 국경을 접한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접촉하여 대독 포위망을 확실시한다. 한편 유럽에서의 전쟁을 지독히도 꺼려했던 영국은 여전히 독일과의 협상을 주장했다. 일단 프랑스의 어그로가 끌리자 나치는 자신들과 협상을 하고자 하는 영국과 이야기해보기로 결정한다.

영독해군협정 : 이 협정의 내용은 별것이 없었다. 영국은 독일이 자국 함대의 35%만을 보유할 것을 요구했고,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고자 했던 나치 독일은 이를 수용한다. 그러나 협정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 협정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데, 이 협정은 결국 영국이 독일의 재무장을 용인하는 꼴밖에 안 되었던 것이다. 베르사유 체제에서 독일은 해군의 보유 자체가 금지당했던 바, 영국의 35%라고는 해도 독일은 이제 합법적으로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해군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독일의 군대보유는 영국에 의해 합법화된 것이다.

이 협정으로 인해 날아가는 비행기에 구멍이 생기듯, 연합국의 대독 포위망에는 거대한 빵꾸가 생기게 된다. 먼저 독일의 재무장 선언에 크게 위기감을 느꼈던 프랑스가 영국을 비난했다. 프랑스 입장에서 영독해군협정은, 영국이 자국의 제해권을 유지하기에만 급급해 내놓은 보신주의적 해결책에 불과했다. 동네 모자란 형 이탈리아도 이때부터 폭주하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연합국 무서워서 대독 포위망에 남아있었더니만 막상 저놈들 아무것도 없네? 하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곧장 호시탐탐 노려왔던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영/프는 그래도 대독 포위망에 남아만 있어준다면야... 하며 이탈리아의 행동을 묵인한다. 즉, 영독해군협정은 대독일 방어전선인 영-프-이가 모두 분열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라인강 유역(라인란트) 재무장 : 베르사유 조약에서 라인강 동서부 50km는 비무장지대로 설정된 바 있었다. 그리고 라인강 서부는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산업적 중요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라인강 유역은 독일의 벨기에 침공루트를 방어할 수도, 독일을 선제공격할 수도 있었던 독일의 아킬레스건같은 곳이었다. 이 지역을 연합국이 점령한 것은 독일의 목덜미를 꽉 틀어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스트레제만 독일 정부가 연합국에게 착실하게 협조하면서 이 지역에서 연합국이 철수하게 된다. 한마디로 봐줬던 셈인데, 히틀러는 영독해군협정으로 대독 포위망에 빵꾸가 뚫린 사이 1936년, 이 라인란트 지역의 재무장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프랑스는 이미 자포자기 상태였다. 히틀러 저 놈이 저렇게 자신있게 재무장하는 것은, 분명 독일의 군사력이 프랑스를 추월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젠 모든게 늦어버렸으니 마지노선이라도 지키자는 프랑스의 소극적 전략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독일 내부에서조차도 라인란트 재무장을 지시하는 히틀러에 반기를 드는 군부 인사가 있었고, 투자해둔 군수설비는 아직까지 풀가동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독일 또한 영/프를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라인란트 재무장은 순전히 히틀러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라고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이제는 벨/네/룩 중립3국에 이권을 가진 영국이 나서서 독일을 비난했지만, 영독해군협정 때와 같이 연합국들의 정책 공조 수준은 절망적이었다. 결국 나치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은 큰 방해없이 이루어진다.

팽창하기 시작하는 독일
결국 히틀러가 취했던 외교방식이란 것은 간단하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연합국의 신경을 슬슬 긁어보고, 연합국이 강경하게 대응하면 깨갱, 아무 말 못하면 어흥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나치 독일은 원하는 바를 성취해나갔으며,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라인란트 재무장을 통해 독일이 패전국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이번에는 그 도박으로 독일의 팽창을 획책한다.

독오합병(안슐루스) : 1930년대 말에 이르러 나치 독일이 팽창하게 된 빌미는, 다름아닌 독일에 대한 전후처리 과정에서 주창된 민족자결주의였다. 히틀러는 끊임없이 게르만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며 중부 유럽 내 게르만 거주 지역을 병합하는 데에 이른다. 제1의 병합대상은 마찬가지로 게르만 국가였던 오스트리아였다. 다름아닌 히틀러 본인이 오스트리아 태생이기도 했고, 1800년대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외치던 세력이 나치의 등장으로 다시금 힘을 얻고 있었으므로, 1938년 독오합병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단,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점령했던 것은 아니었고, 자르 지방처럼 국민투표를 통한 것이었기에 연합국도 어찌하기가 힘들었다. 오스트리아를 두고 독일을 견제했던 이탈리아야 이제 연합국 눈 밖에 나게 되었으니 독일을 지지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와 뮌헨 협정 :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음에도 연합국 측이 미동도 없자, 히틀러는 이제 동유럽으로 팽창하려 한다. 독일은 1차대전을 통해 배운 교훈이 있었다. 서부의 강력한 프랑스를 먼저 쳤다가는 또 다시 오랜 기간을 잡혀있어야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부에서 소련군이 밀고 들어와 양면전쟁을 해야할 것이라 독일은 예상했다. 따라서 이번에는 반대로 동유럽을 먼저 찔러보기로 결정한다. 그러면 마지노선 안에 틀어박힌 프랑스가 쉽사리 병력을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또 동유럽을 어느 정도 정리해둔다면 독일의 프랑스에 모든 전력을 온전히 투사할 수 있게 된다. 이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차대전 이후 동유럽에서의 대독 포위망이 필요했던 연합국에 의해 상당한 덩치를 가진 국가로 탄생했다. 그러나 이것이 히틀러 야욕의 원인이 되었는데,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측에 게르만 거주지인 주데텐란트Sudeten를 내놓으라며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나치의 선동으로 주데텐란트에서도 게르만인들이 분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다름아닌 민족자결주의의 이름으로! 1938년 9월,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최후통첩을 전송한다.

웃기는 것은 연합국들의 행태였다. 원래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방어동맹을 체결한 바 있으므로, 히틀러가 이렇게까지 나오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어야 맞다. 그러나 프랑스는 영국의 참전의사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홀로 독일을 상대로 싸울 의지가 없었고, 그러한 능력도 부족했다. 영국은 또 영국대로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않아 했다. 그래서 생각해냈다는 것이... 영/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압박하여 히틀러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한다. 결국 영/프의 방관 하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생살을 독일에 떼어주는 수밖에 없었고, 히틀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군 주둔까지 요구하기 시작한다.

독일과 소련의 밀회


폴란드의 존재 의의 : 폴란드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와 마찬가지로 1차대전 이후 연합국이 전략적으로 키워줬던 동유럽 국가이다. 다만 체코슬로바키아와는 조금 다른 게, 체코슬로바키아가 전적으로 대독일 포위전선이었다면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모두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 실제로 폴란드는 러시아놈들에게 먹히느니 차라리 독일에게 먹히겠다며 반소주의가 강한 동네였다. 
폴란드는 독일에게 있어서 동부전선에서 맞서야할 군사강국이었고, 소련에게 있어서는 서방의 조종을 받는 괴뢰국가였다. 공공의 적이었던 셈.

소련의 의심 : 스탈린은 본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바로 요전까지만 해도 영/프는 적백내전에 가담하여 자신을 무너뜨리려 했던 적국이었다. 그런 적들이 독일이 미쳐 날뛴다고 해서 소련과 진심으로 협력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영/프가 소련을 대독 포위망에 엮으려는 것이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영/프는 편안히 마지노선 안에 틀어박혀 있고, 독일과 소련을 맞붙여 양쪽 모두의 진을 빼려는 것이 서방의 속셈이라고 스탈린은 판단했다. 뭐 사실 이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영/프는 내심 그러한 부수효과를 바라고 있기도 했다. 스탈린은 여기에 이용당할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의 서방에 대한 의심은 체코슬로바키아 사태에 대한 서방의 무기력한 대처를 목도하면서부터 더 확고해진다. 방어동맹이랍시고 동유럽을 안아주는 듯 했던 영/프는 결국 독일의 요구에 무력하게 굴복했고, 스탈린은 이것이 비단 영/프의 전쟁역량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독-소간 전쟁을 조장하려는 목적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향후 독일이 소련으로 진격할 때에, 영/프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 소련도 버릴 것이 분명했다. 애당초에 체코슬로바키아든, 폴란드든, 소련이든 독일이 영/프를 공격했을 때 빈집털이를 해주는 존재에 불과했으며, 동유럽이 먼저 공격받게 되면 영/프가 직접 나설 가능성이 낮았다.

독소불가침조약 : 이제 스탈린의 생각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비록 프랑스와의 방어동맹으로 얽힌 사이이긴 하지만, 볼셰비키를 그렇게도 적대시했던 서방과의 약속을 믿어줄 의무는 소련에게 없었다. 이에 1939년 독일과 소련은 밀회를 갖게 된다. 이 독소불가침조약의 주요 내용이란 것은, 독소 공공의 적이었던 폴란드를 반띵하는 것과 향후 독일이 서부전선을 오픈하여도 소련은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 등이었다. 이를 통해 소련은 영/프와 독일이 소모전을 통해 맥 빠지게 되기를 내심 기대했다. 즉, 서방이 소련을 이용하려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법으로 소련도 서방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독일 측에서도 양면전쟁을 피할 수 있었으니 이득이었다. 물론 복잡했던 이 조약은 히틀러가 1941년 소련 침공을 단행하면서 깨지게 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930년대 히틀러의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성공은 연합국이 자국 문제로 골골거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며, 다시금 영/프가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면서 히틀러의 모험적인 외교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다. 도박의 성공은 히틀러 본인과 나치 독일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히틀러는 자신이 군사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패전 직전까지 성공했던 도박을 들먹이며 장군 행세를 하려든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은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영화 <몰락>에 잘 나타난다.

2차대전 개막: 유럽전선


독일의 뮌헨협정 위반 : 1939년 3월,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령 보헤미아와 모라비야를 점령한다. 뮌헨협정으로 히틀러가 이제 좀 자중할게염 했던 것만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영/프는 이제야 본격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영/프는 폴란드/루마니아/터키의 안전보장을 선언하며 히틀러를 압박한다. 히틀러의 도박은 비로소 막이 내리게 된 것이다.

폴란드 침공 :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히틀러는 이미 소련의 중립 약속을 받아낸 폴란드 지역에 찝쩍대기 시작한다. 독일의 피를 먹으며 덩치를 키운 폴란드는 언제가는 나치가 점령해야할 대상이었다. 마찬가지로 베르사유 조약 때 빼앗긴 단치히와 단치히 회랑Polish Corridor을 요구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나치 독일은 독일의 모든 경제적 역량을 투자해놓은 군사력을 어떻게든 이용해먹어야만 했다. 영/프와의 전쟁은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날 것만은 확실했고, 그 시점까지 나치 독일은 동유럽의 금싸라기들을 미리 확보해두어야만 했던 것이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군은 폴란드를 침공한다. 동시에 독소불가침조약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 동부 반띵을 먹기 위해 진격한다.

뒤이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영/프가 9월 3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2차대전이 개막되었다. 그러나 소련이라는 동맹을 잃어버린 영/프는 전쟁 선포 후에도 쉽사리 독일로 진격하기가 힘들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사이 빈집을 털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황을 교과서로 배운 현대인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당시 영/프는 일단 간부터 좀 보자는 식으로 서부전선에서 그저 머물기만 하였으며, 폴란드 치느라 바쁜 독일도 서부전선에서는 잠잠했다. 프랑스 침공까지 1년 간 이러한 소강상태가 계속되는데, 이를 가짜 전쟁Phony War이라 한다. 이에 관해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독일 측 발전소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던 한 프랑스 마을이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는 정전이 일어나고, 프랑스인들은 이제 독일이 프랑스를 치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시간 후 전기는 다시 들어왔고, 독일 쪽 확성기에서는 "프랑스 시민 여러분. 방금 전의 정전은 전쟁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발전기계가 고장나서 그런겁니다."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게 폴란드 침공 당시 서부전선의 모습이었다.

프랑스 침공 : 폴란드를 성공적으로 확보하고, 북유럽까지 수중에 넣은 독일은 1940년 5월, 프랑스를 침공한다.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을 통해 독일군은 네덜란드 ~ 벨기에 북부에 기만 주력을 배치하고, 실제 주공은 벨기에 남동부 아르덴 숲으로 진격했다. 독일군의 주요 교리는 전격전(기동전)이었는데, 이는 적의 섬멸보다는 전차의 높은 기동성을 활용하여 적진 종심 깊숙히 침투, 적의 보급로와 통신/지휘체계를 모조리 박살내어 적 부대를 해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이 작전은 2차대전도 1차대전과 같이 누가 참호에 사람을 더 많이 갈아넣느냐로 승패가 결정될 줄 알았던 프랑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해산된 적 부대들은 뒤이어 들어온 독일군 보병에게 대패. 결국 프랑스는 6주만에 함락당했고, 나치 독일은 양면전선을 극복하는 데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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