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유럽연합과 유로존을 태동케 한 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 당시, 파리지앤들은 저마다 조약 전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통화공동체와 초국가적 정치연합체의 미래를 논했다고 한다. 세계구급 지성을 수많이 배출한 프랑스이지만, 그 당시의 평범한 파리지앤들마저도 최적통화지역론이라든지 혹은 환율과 금리의 수렴조건 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해프닝은 지적허영심의 단적인 사례로써, 고꾸라진 열강 프랑스를 조롱하는 자리에서는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그 허영심이라는 것의 지향점이 루이비통 핸드백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담론이라는 점에서 나는 프랑스인들에 대해 무한한 동경심을 품곤 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손댄 원동력은 다름아닌 92년 파리지앤들의 허영심에 가까웠노라 고백하고 싶다. 늘상 점심시간이면 입사동기들과 규동을 즐겨먹는 내가 저러한 제목을 가진 책에 손을 대게 된 것은, 멘부커 인터내셔널인지 무엇인지 하는 어찌됐거나 노벨 문학상에 버금가는 큰 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이유 단 하나였다. 상주는 사람이 호평하는 작품과 대중을 끌어모으는 작품이, 최소한 재미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결코 궤를 같이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고등학교 시절 문학 시간에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그래서 책을 시키면서도 나는 '또 먼지 이불을 뒤집어쓸 모기채 하나만 늘었구나' 하는 걱정을 접을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받은게 어젯밤이었고, 다 읽어 감상문을 쓰는게 오늘 밤이니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줄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연상호 감독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에서 "철이"는 인간이 악해져야만 하는, 악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비교적 와닿기 쉽게 설명해낸다. 인간에게는 상대의 피부 깊숙한 곳까지 물어뜯을 수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없다. 또한 상대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낼 수 있는 벼려진 발톱도 없다. 태생적으로 인간은 무방비상태로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은 칼을 창조했다. 그런데 칼이라는 놈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일부가 아니라, 손아귀에 꽉쥔 힘을 푸는 순간 인간은 또다시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또다시 악을 창조했다. 악한이 되어 칼을 꼭 쥐고 놓치지 않아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법과 윤리와 사회가 탄생함에 따라 칼은 칼집에 꽂혔으되, 악만이 오롯이 남아 인간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인간은 자기보호를 위해 악해져야 했다.

한강 작품에서 육식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폭력"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돼지의 왕>에서 철이가 이야기한 "악"의 개념과 가깝다 볼 수 있다. 불가피하다함은 곧 자신의 생존과 자기보호를 목적으로 한다는 뜻과 상통한다. 도축된 고기를 통해 동물성 지방과 단백질을 공급받지 못하는 인간은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고기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또 도축의 과정이 잔인하든 인도적이든,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생존만을 위해 무고하게 살해당한 다른 생명체의 죽음을 담보로 살아가야만 한다. 나아가 그 행위는 포식자-먹이 관계에서 벗어나 동등한 계급에 있는 동족들과의 생존혈투에까지 이어진다. 내가 살기 위해서 이따금씩 타인에게 상처주는 행위를 서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폭력의 불가피성은 1부에서 영혜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비교적 원초적인 이미지로 표상된다. 월남전 참전 용사였던 영혜의 아버지는 일신의 생존을 위해 베트콩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만 총부리를 거둔다는 것이, 혼자서만 육식을 포기한다는 것이, 또 혼자서만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겠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더이상 최우선 가치로 삼지 않음을 뜻한다는 걸 영혜의 아버지는 알고 있다. 그런즉 이해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채식주의자로 돌변한 딸의 입에 억지로 고기를 쑤셔넣는 행위는, 최소한 그의 입장에서는 아버지로서 마땅히 다해야할 도리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정당화, 보편화, 본능화된 폭력성에 대한 반성
작품 3부에 이르러서 영혜는 정신병동에 감금되기에 이른다. 즉 육식에 대한 거부가 치료받아야만 하는 질환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3부는, 불가피적인 폭력이 어느샌가 정당화되고 보편화되어버린 세상을 무대로 하고있다. 이에 영혜는 육식 뿐 아니라 모든 먹는 행위를 거부함으로써 애처롭게 저항한다. 이 장면은 채식 또한 생명을 앗는 행위가 아니냐는 극단적 반채식주의자들의 논리에 반박키 위한 장치로 보기는 힘들다. 그보다도,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메시지는 좀더 깊은 지점에 이르지 않았을까?

영혜의 저항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단순한 거부라고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영혜가 진정으로 저항했던 바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자기보호라는 미명 하에 아무런 반성없이 당연시되는 세상의 인식 그 자체였다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더 이상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겠다는 영혜의 순수로의 회귀는 사회 일반의 관점에서 병리적 현상으로 간주된다. 병리적 현상이라는 것은 통념적으로 마땅히 행해져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특정 행위를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그것이 육식의 거부로 표상된다. 육식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도의든 윤리든을 묻지 말고 그저 행해야만 한다. 즉 육식은 그 자체로서가 모든 다른 행위들의 근본적인 원동력이며, 모든 다른 행위들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최초의 소급지점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존 의미를 회의한다는 것이고, 그를 방증하듯 영혜는 죽음에 가까워진다.

본디 인간은 자기보호 기제로 인하여 어떠한 지점 이전부터는 소급하여 근거를 묻지 않는다. 그 지점을 우리는 공리 내지는 도그마라 일컫는다. 베트콩을 향해 총을 쏘던 영혜의 아버지는 살인행위의 근거를 자신의 생존에서 찾았겠지만, 타인의 생명을 강탈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보호라는 것은 더 이상 소급하여 물을 수 없는 최초의 전제조건이고, 자기보호에 수반되는 행위들 또한 언제나 법이나 개인의 도덕률이 판단할 수 있는 저변 저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당한가? 그렇다면 자기보호라는 범주는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 생존 그 자체인가, 아니면 일신의 윤택한 삶인가? 설령 생존 그 자체만을 자기보호로 한정한다고 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모든 잔악함이 용서받을 수 있는가? 영혜는, 그리고 한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의 모습

영혜의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작가가 그리고자 한 우리의 모습을 한번 이야기해보자. 이 작품은 1부에서 영혜의 (전)남편을, 2부에서 처제 영혜에게 연심을 품고 결국 부적절한 관계에 이르는 영혜의 형부를, 3부에서 영혜의 언니를 화자로 세우고 있다.

(어쩌면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독자들이 해당될) 영혜의 돌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혼에 이르게 된 남편의 모습은 말그대로 폭력성에 대한 성찰없이 완전하게 둔감해진 인간상을 떠오르게 한다. 애당초 남편은 영혜의 돌변 그 자체에만 분노할 뿐, 그 원인에 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의 아내를 끝까지 몰이해의 시각으로 바라보다가 이내는 떠나버리는 것이다. 이들은 최초의 소급지점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며, 폭력이 보편화되고 내재화된 사회의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나치 치하의 아이히만과 같달까?

예술가로 등장한 형부의 경우, 순수성으로의 회귀를 갈망하지만 현실적으로는 폭력성을 씻어내지 못한 위선자의 스탠스를 취한다. 2부에서 영혜 엉덩이의 몽고반점은 영혜가 태초의 순수성을 잃지 않았음을 상징하는데, 형부는 영혜의 자유로움와 몽고반점을 동경한다. 그러나 그는 영혜처럼 육식을 포기하면서까지 영혜와 같은 지점에 이를 자신이 없다. 작중 묘사를 보면 그러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듯 하다. 형부는 그저 온몸을 꽃과 식물로 위장해 영혜와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순수성을 "소유"하려는 태도를 취한다. 영혜에게로 다가가는 그의 여정은 치밀하고 계획적인 성폭력에 가까우며, 영혜의 순수성을 갖고자 하는 동기 또한 작품의 완성이라는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영혜가 이끌린 것은 형부의 육체가 아닌, 그를 뒤덮은 꽃과 식물의 형상 뿐이었고 이에 분노하고 좌절하며 파국을 맞이한다.

언니는 순수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폭력 앞에 굴복하는 인간상을 그려낸다. 언니 본인은 결과적으로 순수성에 이르지 못했지만, 영혜가 변하게 된 원인이 아버지의 지속된 폭력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그러한 폭력의 모습들이 결코 자기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인지하고 있다. 즉 폭력의 소급지점에서, 그 왜곡된 목적성과 잔악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부러 도피와 침묵으로 일관하는 군상이 바로 언니의 모습이다. 언니는 결국 인내하고 수긍했다. 순수치 못한 세상의 힘에 굴복하고 변하지 못한채 살아왔다. 마치 우리들처럼.

마치며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리뷰할 때면 늘 드는 생각이지만, 작가나 감독 본인이 직접 내 글을 읽는다면 어떻게 반응할지가 항상 궁금하다. 현대 예술의 본질은 압도적인 문체와 위용으로 대중을 위압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 소통에 있다고 생각한다. 훌륭하지 못한 글에 구태여 구구절절한 변론을 해보자면 어떠한 책에 관해 감상문을 쓴다는 것은 독자의 시점으로 작품을 재창조하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원작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니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손에서 좀처럼 놓기 힘든 작품이었다. 간만에 활자를 읽었으니 읽은만큼 뱉어내어 시원한 느낌이 드는건 내 체질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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