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점심즈음이 되면 어느 교회의 전도사들이 내 방앞에 진을 치고 기숙사에 올라가는 순진무구한 새내기들을 낚기 위한 수작에 들어간다. 수법은 참으로 악랄한데, 길을 묻겠다고 해놓고서 전도하는 것은 예사요, 츄리닝을 입은 학생에게는 대뜸 백미터 몇초에 달리느냐로 시작하여 예수를 믿으라는 말로 끝맺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어째서 저런 언변을 보다 생산적인 곳에 쓰지 않는지 의문이 들곤한다. 심지어 중국인 학생에게는 중국어로 전도를 하니 이제 전도도 온디맨드 기반이 되는 것 같아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그래도 여긴 개운사라는 큰 절이 채 50미터도 떨어져있지 않은 곳인데, 부처님 나와바리에서 장사질하는건 아무래도 상도덕이 아니지 않은가. 신들끼리도 엄연한 세력권은 있을 터. 겉보기로도 구제받기 힘든 타락영혼으로 보여서인지 어째서인지, 막상 제일 자주 마주치는 내게는 단 한번도 전도하지 않은 것에 조금은 섭섭한 마음이 들 정도로 저들은 전도 삼매경에 빠져있다.

지난번에 누군가가 전도에 관해 쓴 글을 읽었다. 자신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대표되는 파시스트적인 크리스천도 아닐 뿐더러, "교회 나와라"가 아니라 타인에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해준다는 생각으로 전도에 나서는데 길거리에서 냉대받는 것이 어지간히도 서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나 단순히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붙잡다는 행동과 개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이 전도행위가 외면받는 이유는 아니다. 외면의 뿌리는, 한국 개신교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가리지 않고 아브라함계 신앙(심지어 이슬람교까지도)이 제1의 가치관으로 여기는 "포용"을 철저히 배척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 개신교는 민속적 기복신앙과 배타주의(혹은 비민족적 쇼비니즘), 종교적 제국주의, 정치적 보수주의가 결합해있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것이 더 타당할 때가 많다. 개독교라는 비판은, 포용을 잃은 한국 개신교가 스스로 자초한 것에 가깝다.

흔히 전도라는 행위는 피전도자의 삶의 양식을 가치판단하고 나아가 아예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피전도자의 삶은 종교적 도그마라는 잣대로 이방인으로부터 남김없이 비판당함은 물론, 각자의 삶을 통해 정립해온 자율적인 도덕체계조차도 종교에 의해 재단당한다. 또한 피전도자는 자신의 자아를 버리고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추상적 존재를 삶의 중심에 놓도록 강요받으며, 그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스스로 마비시킬 것을 요구받는다. 이는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횡행했던 자아비판과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다. 소련의 대숙청과 중국의 문화혁명, 북한의 8월 종파사건 시 "위대하신 수령님"의 눈밖에 났던 권력자들과 토호들이 자신들의 자본가적 기질을 낱낱이 드러내어 스스로를 반동분자로 낙인찍고 홍위병들에게 몰매맞던 그 광경이, 다름아닌 현대 한국의 길거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점에서 복음을 원치않는 사람에게의 강제적인 전도행위는 심정적인 폭력과도 같다. 법적인 처벌없이 대중의 외면 정도로만 끝나는 것이 오히려 개신교 입장에서는 다행일 지경이다.

아무도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철학을 갖고 살아간다. 그것은 무슨무슨 ~ism으로 대표되는 철학적/정치적 견해일수도, 기성 종교의 교리일수도, 심지어 다소 코믹하고 경박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으리!!"같은 가치관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상에서 존중받아야 하고, 삶의 다른 어떤 견해로부터 "감화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을 권리가 있다. 개신교인이 굳이 교회 나오라는 소리까지 하지 않더라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전도과정에 수반되는 내 삶에 대한 원치않는 비판과 감화는 분명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왜 다른 종교가 아닌 개신교의 전도행위만 문제가 되는가?

여기서 잠깐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특성에 관한 역사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은 본래 믿음과 더불어 선행도 함께 행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채택하고 있다. 그것이 가톨릭 성당에서 정기적인 미사와 더불어 삶의 반성 격인 고해성사를 실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세 가톨릭 수도원들은 지역사회의 부를 독점하며 실천적인 선행보다는 금전기부로 퉁치자는(...) 채리티 펀드의 성격이 짙어졌고, 마르틴 루터가 이러한 수도원들과 교황청의 세속화(표면적으로는 면벌부 판매)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면서 프로테스탄티즘이 흥하게 된다. 이에 따라 루터 이후 프로테스탄티즘은 인간 이성에 따른 자의적 선행을 거부하고 성경에 대한 믿음에 따라 살다보면 자연스레 선한 삶을 살 것이라는 교리를 채택하였고, 이는 칼뱅이 "한낱 닝겐일뿐인 너님들이 잘 살려고 노력해봐야 구원되는 놈들은 정해져있음. 그니깐 걍 닥치고 성경믿쪙 ㅇㅇ"하는 예정설을 주창하면서부터 더욱 공고한 교리가 된다. 이것은 가톨릭과 사제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의 99.9%가 메타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기존의 도덕관념과 전통을 경전 못지 않게 중시하던 가톨릭의 세속화나 부패와는 또다른 문제(경전에 대한 믿음이 현실적인 선으로 귀결될 수 있는가에 대한)가 개신교에서 발생하게 된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배제한 채, 교회와 성경 자체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이 근본주의화의 핵심적인 원인인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 계열의 성경무오주의 내지는 근본주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신교가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을 기초교리로 하는 그리스도교(다문화 제국이었던 로마제국이 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했는지 생각해보자)로부터 거리가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나마 서양의 개신교는 성경에 대한 해석 차이로 발생하는 여타 종파들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며 가톨릭의 교세에 대항했지만, 유독 개신교도들이 많은 한국에서는 "그런거 없다". 그저 교단 간 신자 머릿수 채우기 밥그릇 싸움 뿐이다. 여기에 개신교가 한국에 수입되는 과정에서 정치편향성, 민족적/인격적 다양성에 대한 배타주의와 집단주의, 기복신앙적 요소들이 섞여 들어가면서부터, 개신교는 더할나위 없이 앞뒤 꽉꽉 막힌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종교가 한 수 접고 들어가야만 공존할 수 있는 과학계와도 진화론을 두고 맞짱을 뜨며(...) 탈탈 털리는 모습을 보여준 한국 개신교는 이제와 바람직한 종교, 사람들이 믿고싶은 종교의 모습과는 아득히 멀어진 것이다.

피전도자의 삶을 부정하는 기저에는 종교인들이 갖는 영적인 선민의식이 깔려있다. 그들은 비종교인 혹은 타종교인의 철학을 포용의 대상이 아닌 감화의 대상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개신교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종교라는 체제 자체가 근본적으로 함유하는 기본 속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테지만, 노아 이야기와 요한계시록을 언급하며 진지하게 자신들을 "선택받은(구원받은) 이들"이라 여기는 집단은 한국 개신교와 신천지 등을 비롯한 소수의 사이비 집단밖에는 없다. 불교가 개인의 고뇌를 통한 영적인 완성을 추구하고, 가톨릭이 신앙에 대한 이해와 (개신교에 비해서는 비교적) 속세에서의 선행에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는 반면, 믿음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 이토록이나 주안점을 두고 믿음=구원이라는 등식을 펼치는 곳은 한국 개신교가 유일하다. 이러니 한국 개신교도들은 별다른 노력(수행이나 선행) 없이도 "불신자"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기 쉽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교리적으로도 믿음이 구원이므로, 타인이 개신교 교리를 믿게하는 행위를 그 사람을 구원하는 행위와 동일시함으로써 더욱더 세 불리기에 몰입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또한 같은 그리스도교 계열이라도 중앙집권적 형식을 고수하는 가톨릭과는 달리, 개인 사업자의 형태를 띄는 한국 교회 입장에서는 무제한 전도 마케팅과 기상천외한 헌금수입체계 구축이야말로 교회수입을 늘릴 수 있는 주요 매커니즘이 되었다. 이는 전도하는 이들에게 "그럼 개신교는 믿되 교회는 너네 교회말고 다른 교회를 가면 안되나요?"란 말을 하였을때 필사적으로 자기 교회를 나와야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전도와 예배는 사회주의식으로, 장사는 자본주의식으로 하는 것이 현대 한국 개신교의 본질이다. 여기에 목회자의 결혼과 출산이 허용됨에 따라 교회를 부자상속하는 정신나간 일이 신문 기삿거리도 못되는 것이 일상이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이단이라고 지탄하는 통일교 문선명 일가와 정확히 똑같은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의 전도행위는 어떤 측면으로 보아도 순수한 종교활동의 범주를 넘어섰으며, 그것은 개신교도들의 주장과는 달리 더이상 "일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없다. 한국 개신교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전도를 외면하지 않을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전도행위 그 자체를 중단하여야만 다시금 포용의 사상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는 다양성으로 인한 제국의 분열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던 로마에 의해 포용과 사랑의 상징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런데 정작 한국의 개신교도들은, 예수를 죽였던 그 배타의 칼을 그대로 들고 예수를 부르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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