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외과 진로에 관한 글에 달린 수많은 학생들의 답글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의 갈등을 이야기했다. 그런말을 들을때마다 목구멍까지 치미는 소리는, 그렇게 현실을 위한다면 정외과에는 왜 진학하려고하는 것이며, 대학은 왜 가려고하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현실적으로 살고싶고 현실을 포기하기가 싫다면 당장이라도 기술 하나 배워서 먹고살 생각을 해야지 4년동안 비싼 등록금내며 뭣하러 돈낭비 시간낭비하고 쓰잘데없는 고민을 하나. 그런 말을 하면 그들은 또 현실적으로 대학엘 가야 한국사회에서 살아남을수 있단다. 그놈의 현실. 마법의 단어다. 진공상태인 자신의 미래관을 억지로 채워넣는 텅빈 말에 불과하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돈을 원하는건지 배움을 원하는건지에 대해 확신도 없는 애들이 대학간답시고 수능보고 원서넣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 말하지만, 그럴거면 그냥 기술배우고, 꼭 대학에 가야겠다면 경영학과에 진학하는게 속편하다.

일상생활에서 현실 현실거리는 사람치고 정말 현실적인 사람 못봤다. 현실이라는 것은 당장 내게 주어져있는 이 환경, 그 어떤 가치관도 침범되지 아니한 지금의 이 상황이다. 현실이라는 단어를 곡해하고 남용하는 사람들은 "현실을 위해서"라는 구절을 마르고 닳도록 말하곤 하는데, 현실은 위해지거나 지향되는 목적성의 개념이 아니다. "위해서"라는 지극히 지향적이고 합목적적인 수식어로 인해 그들이 말하는 현실은 더이상 현실이 아닌 것이 된다. 자칭 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그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혐멸과 증오를 포괄하며, 동시에 그렇게 혐오하는 환경에 굴복하겠다는 비굴성을 내포한 개념으로서, 그건 이미 객관적 현실이라 말할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위한다는 현실이라는 게 실상은 이상인가 하면, 그들 자신부터가 심정적으로 그것을 이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있으니 이상도 아니다. 이를테면 현실 현실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현실과 이상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 모호한 형태의 미래관은, 실상 그것이 이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속물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포기하지는 못하는, 그런 이중적인 미래관이라 하는것이 더 의미에 맞을 것이다. 이러한 미래관을 "현실"이라 왜곡하는 것은, 자신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렇게 살아갈 자신에 대한 자기변호이자 자기위안이다. 그 속물적인 것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닌, "현실"이기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따라야만한다는 치졸한 변명이다. 즉, 자신이 가진 미래관에 그다지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현실주의자로 자칭하며 모든 일에 현실을 들먹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돈에 대한 바람 또한 현실이 아닌 엄연한 이상이다. 사농공상의 상이 가장 천한 것으로 여겨졌던 조선 왕조로부터의 유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돈"이라는 것은 상당히 애증서린 단어로 쓰인다. 누구나 돈을 원하지만 차마 원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싶다는 말을 섹스를 하고싶다는 말과 같은 차원에 둔다. "물론 원하기는 하지만 어찌 대놓고 말을 하느냐..."하는 체면치레의 문제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돈을 많이 벌고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약삭빠르고 계산적이다"라는 딱지를 붙여놓았다. 실상은 다들 돈 돈 돈 하면서도, 겉보기에는 돈 원하는 놈이 하나 없다. 명색이 자본주의 국가인데,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으로서 돈을 언급하는 것이 죄악시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위선과 가식의 세계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서"라는 말을 "현실을 위해서"라는 말로 돌려말하기 시작했고, 현실=돈을 벌기위해 해야하는 것, 이상=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이제와 현실과 이상이 엄청나게 괴리되어 떨어져있는 상호배타적인 미래관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애초부터 현실은 이상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차마 이루지 못한 부족한 것 혹은 부정적인 부산물들을 포함한 개념이다. 반대로 이상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부족하거나 과잉한 모든 것들을 가지쳐낸 최적의 미래관이다. 현실에서의 부조리는 다시금 피드백되어 이상을 견고히 하거나 새로운 이상을 창출시켜내고, 또다시 이상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 둘은 뗄래야 뗄수도 없고, 취사선택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금전적 여유가 목표인 이들에게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이상일수도 있고, 이 이상을 바람직하다 그렇지않다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전인류적이고 대승적이고 대단한 이상을 가지고 살 필요는 없고, 또 그런 이상만을 바람직한 이상으로 취급하는 것 또한 무자비한 폭력일 뿐이다. 개인은 속물적(이 단어 또한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이상을 위해 속물적으로 살 권리가 있고, 그 권리행사의 첫 출발로써 우리는 최소한 우리의 속물적 이상을 페미니스트들의 누드시위처럼 솔직하게 내보여야만 한다. 숨기고 숨겨봤자 "돈에 대한 이상"="현실"이라는 졸렬하고 배리적이기 짝이 없는 등식만을 성립시킬 뿐이다.

뭘해도 살아가는건 힘들다. 돈을 좇아 하고싶은 것을 포기하여 불행한 사람, 하고싶은 것을 좇아 돈을 포기하여 불행한 사람을 나는 각각 최소 열명씩은 나열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차피 행복과 불행은 무엇을 선택할지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그런고로 내가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이상향이 돈에 있는지 돈 이외의 것에 있는지에 따른 분류가 합당한 분류방법인가 하는 것이다. 어째서 음악적인 성공이 금전적인 성공보다 더 고상한 것으로 여겨져야만 하나. 어째서 정치적 이상이 개인 일신의 금전적 이상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여겨져야만 하나. 한비X 씨가 7급공무원이 꿈이라던 청년의 뒷통수를 한대 때리며 그런것은 꿈이 될수없다고 했더란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게 뭐가 어때서?"란 거다. 도대체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살면서 나는 7명의 사람을 죽이겠습니다, 7명을 등처먹겠습니다는 소리도 아닌데 어째서 그게 이상이 될 수가 없는가. 어찌됐든 사람이란 존재는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안정되고 윤택하게 살아가려는 것이 본능이고, 이것은 억누를래야 억누를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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