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미적지근했던 올해의 북풍이 선명치 못했던 자취를 감추고, 청명한 일광만이 소리없이 대지로 침전한다. 따뜻함이 채 여물지 못해 몽롱하게 누렇던 경칩의 정오는 이제와 애티를 머금고 하이얗게 밝아올랐다. 깃털이불처럼 간지럽게 덮이어오는 새봄의 초입에서, 문득 투쟁을 떠올렸다. 홀씨 한 점 들일 틈없이 치밀한 콘크리트 타워는 지난밤 동장군과 함께 했던 정사(情事)의 추억을 아직까지 잊지 못해, 백열의 봄볕 아래서 홀로 차갑고 시퍼렇게 발기해있다. 그리하여 아닌 봄에 콘크리트 감옥 안 죄수들 모골마저 송연케 하니, 때를 잊고 사그라지지 못한 그 북풍의 편린을 우리는 "인사발령"이라 한다.

J과장은 근 3년 가까이 일했던 우리 부서에서 짐을 쌌다. 인사라는 것이 늘 그렇다고들 한다. 여의도 공원에 벚꽃이 흐드러질 무렵이 되면 누군가는 두당 오만원을 넘기는 고급일식집에서 축하턱을 쏘지만, J과장 같은 사람에겐 거진 부고나 다를 것이 없다. 안타까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이제서야 콘크리트 감옥에도 안도의 봄이 오니까. 워낙 따랐던 사람이었기에 혼자 울적해있었으나, 두X씨도 이제 이런거 익숙해져야해, 그렇게 정 많으면 힘들어, 두X씨 나 나갈때도 이렇게 슬퍼해줘야해, 하는 소리만 들었을 뿐. 정이 많아도 힘들거니와, 적이 많아도 힘들 것이기에 여남은 울분은 목구멍 아래로 삼켜버렸다. J과장의 빈자리엔 놓을 곳 없어 애물단지였던 컬러프린터가 얹히고, 그 옆으로 신입사원들이 자리잡았으니 허전함도, 위화감도 없다. 마치 태고적부터 그런 모습이었던양 새봄처럼 천진하고 의뭉스러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사람은 입체다. 관점에 따라 같은 실체가 전혀 다른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부장을 두고 어떤 이가 참 좋으신 분이라 할 때 그의 죽통을 날려버리고픈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냈고, 그래서 H대리가 J과장의 험담을 늘어놓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의 페르소나처럼 여겨져 각별히 따랐던 J과장이지만 누군가에겐 달리 보일 수도 있다. 나의 호감을 H대리에게 강제할 권리는 없고, H대리 또한 악감정을 내게 강제할 권리가 없다. 내가 일관했던 침묵은 나와 H대리가 같은 사람을 보되, 서로 완전히 다른 존재를 본다는 데에 기인했다. 그리고 H대리가 목도한 J과장의 소위 "진면목"이란 것은 부장과 본부장 가릴 것 없이 퍼져나가, 기어이 J과장을 몰아내고 컬러프린터를 앉혔다.

회식 때마다 우리 부서의 건배사는 늘상 "우리가 남이가?"였다. 그 진부하기 짝이 없는 건배사 후엔 부장의 게걸스런 타액이 덕지덕지 발려있는 소주잔 하나가 단합이란 미명 하에 부서 한바퀴를 공전했다. 내가 구태여 이야기를 꺼내 당최 섞이기 힘든 암청색 침묵을 일구어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환송회식이나 환송선물 따위 입에 담지 않았다. 발령명령서의 접수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의식이어서, 그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모두의 기억으로부터 J과장의 존재가 무결하게 삭제되었음이 틀림없다. 오늘은 어제와 다름없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미래들이 꼬리물 것이다. 두 발자국만큼의 내 지분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벚꽃은 피고 질 것이다. 갈 데 없어 애꿎게도 신입 자리에 놓여진 커피머신은, 내가 없어지더라도 훌륭하게 내 자리를 채워가겠지. 아무런 위화감 없이, 한 잔의 소주와 함께.

한강철교 철골 위엔 까치가 둥지를 틀었다. 한바탕 요란히도 지나가는 1호선 전동차를 피해 까치들은 아크로바틱한 궤적을 그리며 착지한다. 철골 위 까치처럼 세상이란 장면에 제 색 잃은 오브제로 점차 스며들다가도, 차디찬 세상의 금속덩이가 나를 치어 존재의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곤죽을 만들어버리진 않을까, 오금이 저릴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고작해야 커피머신 따위로 내가 잊혀질 수 있다는 세상의 공리는, 도리어 육신의 죽음이야말로 진정 평화로이 여겨질만큼 잔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숫제 우리가 서로 남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준다면 좋으련만. 완전한 타인이라면 망각도, 대체도 겸허히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로 불가침한 영역에 꽃무늬 테이블보를 펴고, 촛불을 켜고, 장미 한 송이를 꽂고 상대를 초대하는 것. 그렇게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희생하여 내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가족이라고, 누군가가 확신에 차서 말해주면 좋겠다. 담배연기처럼 허망하게 흩어져버리고 마는 단합 대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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