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출근길. 텅 빈 노들길을 질주하는 총알택시 차창엔 여름 초입의 나른한 오후 두시가 푸르게 흐드러진다. 풀빛 캔버스 위엔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채 조는 소년의 늙은 그림자가 덧입혀진다. 검지도 않은 것이 희지도 아니하고, 잿빛도 아닌 것이 투명하지도 아니하다. 서울을 닮아 그렇다. 서울살이를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공구리빛이 되고 말았다. 영등포 철공소 골목을 닮아 눈빛도 쇳빛이 되고 말았다. 여름이면 달아올랐고 겨울이면 식어 빠졌다.

야구 좋아해요? 기사 아저씨가 슬그머니 고요한 캔버스 위에 조심스레 데생을 하기 시작한다. 별로요. 꾸밈없는 사실을 말한다. 야구 좋아하게 생겼는데? 당최 야구를 좋아하게 생겼다는 것은 어떻게 생긴 것을 뜻하는 건가 궁금해져, 나는 핸드폰 화면을 거울삼아 이리저리 돌려보며 괜스레 다듬을 것도 없이 짧은 머리칼을 매만진다. 그럼 다른 스포츠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운동을 즐기지 않는다. 남이 운동하는 것을 보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경쟁이란 것은 스물여덟 청춘살이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던가. 아 거참 희한하네, 남자가 스포츠도 안 본단 말이야? 아저씨의 조심스럽던 연필선은 이제 짙은 목탄 자욱이 되어 몽롱한 캔버스 위에 검은 윤곽을 그려낸다.

스물여덟 청춘살이, 하루살이 같던 일일을 되새겨보니 길지 않은 족적엔 불나방의 인분(鱗粉)이 덮이어 회빛이다. 내일의 내가 언제부터 그리도 전능하게 여겨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오늘의 행복을 희생하면 내일의 행복은 이자까지 쳐서 돌아올 것이라 나는 배워왔다. 그렇게 믿어왔다. 머리 빨리 새는 아버지를 닮아 희끗희끗 새치가 나기 시작한 오늘까지도 그래왔다. 꿈이라는 단어의 위선이, 현실이라는 단어의 위악이 코발트빛 여명처럼 슬그머니 보이기 시작하자 문득 무지막지한 덤프트럭이 떠올랐다. 여전히 내일이라는 것에 한눈이 팔린 채 모처의 길을 건너다가 덤프트럭에 치여, 이 차디찬 아스팔트 위에서 의미 없는 곤죽이 되어버리면 어쩌나. 멋들어진 신세계의 한 뼘조차 구경치 못 하면 어쩌나. 럼주에 취한 뱃사람 같은 기사 아저씨의 질문은 젊은 소년의 늙어버린 가슴을 후벼 파고들었다.

낚시는? 내 한때 바다낚시 좀 다녔거든. 싫어해? 그럼 등산은? 아니 취미로 즐기는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 이렇게 좋은 날에 말이지, 젊은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돼.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간 괜히 벌집을 들쑤신 모양새가 될 것만 같아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럼 술은 잘 마시나? 샌님같이 뵈는 손님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에 쏠쏠히 재미가 들렸는지, 조르바 아저씨의 스무고개는 여의도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 사무실의 은빛 건물이 반갑게 가까워온다. 서둘러 값을 치르고 내리는 내게 조르바는, 젊은 친구, 재밌게 살아. 그 시절 다시는 안 온다구. 조르바는 뱃사람처럼 경적을 빵하고 한 번 울리고는 은청색 빌딩 숲 저 너머로 멀어져 간다.

나는 대답한다. 다음부터 하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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