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형성과 결집

 

 

공동체는 항상 분노를 표출할 대상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는 공동선을 위해 구성되고 공동선을 위해 결집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과서에서나 나오는 소리일 뿐이다. 기실 공동체를 구성하고 결집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악(혹은 공동악)이나 정적(政敵)을 설정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으며, 이는 세계평화를 위해 결성되었다는 국제연맹이나 그 후신인 국제연합(UN)보다는 특정 패권국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동맹이 더욱 효과적으로 동작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간이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맹수나 먹이감 사냥의 효율성을 위함이었지, 사냥의 대가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따위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였을 뿐이다. 사회와 과학이 발전하면서 절대악의 대상이 더이상 맹수나 사냥감이 아니게되자 인간은 점차 같은 인간을 절대악으로 상정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하나의 공동체 내에서도 상호 대립하는 하부 공동체들이 탄생하게되었다. 이처럼 절대악의 "필요성"은 비단 국가간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 내부적으로도 사회구성원들의 분노의 대상은 다수의 대상으로 분산되어있기보다는 소수의 특이점으로 집중되어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논리는 가뜩이나 집중화된 분노의 대상을 더욱 좁혀나가게 되고, 사회는 거시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두개의 대립하는 집단으로 양분화된다. 그 양분화의 스펙트럼은 좌파와 우파, 집권세력과 야당,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대표되며, 각기의 집단은 상응하는 반대 집단을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반드시 제거해야할 존재로 매도한다. "선거"로 대표되는 대표자 선출과정에서는 어떤 집단이 반대 집단에 대한 분노를 더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규합할 수 있는가가 승패를 좌우한다. 한국의 모든 선거과정에서, 전혀 그런 스펙트럼이 어울리지 않는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조차도, "빨갱이 척살"이나 "정권심판"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비단 한국사회만이 가진 어떠한 특수성이라기보다는 자의적으로 설정한 절대악을 견제하기 위해 결집하려하는 인간의 본성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대립되는 두 집단의 정체성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하나의 집단이 반대집단으로 규정한 집단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가령 빨갱이가 없다면 빨갱이를 척살하자는 집단의 존재의의가 사라지며, 심판할 집권정당이 없다면(없을수는 없겠지만) 집권정당을 심판하자는 논의도 그 가치를 상실하게되고마는 것이다. 따라서 반대집단을 절대악으로 상정하는 집단의 수명은 어디까지나 반대집단과 그 수명을 같이 한다. 이는 러시아 혁명 과정에서 10월 혁명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혁명을 위한 민중의 지지를 결집하고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는 데에 성공한 직후 곧바로 볼셰비키와 맨셰비키로 분열하여 적백내전으로 서로를 물고뜯었으며(물론 정확히 말하면 적백내전 당시 백군에는 러시아 기존 보수세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볼셰비키가 완전히 중앙당과 소련을 장악한 이후에도 세계혁명론을 둘러싸고 스탈린계와 트로츠키계로 양분화되어 피바람 몰아치는 대숙청이 일어났다는 것에서 알수있다. 러시아의 공산화와 동시에 소비에트의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일으킨다는 존재의의가 소멸되었고, 적백내전에서의 승리와 동시에 볼셰비키가 대중정당과 온건한 혁명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맨셰비키에 대항한다는 존재의의가 소멸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각 집단은 자신의 반대집단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 곧바로 그 존재의의를 잃고 또다시 분열하는 양상을 보인 것이다. 러시아의 예시까지 볼 필요도 없다. 당장 80년대 한국사회의 운동권만 해도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투쟁의 구심점을 상실하고 NL계, PD계 등으로 분열했고, 그나마도 민주노동당 시절에는 명목상으로나마 손을 잡고있는 듯 했지만 종북논란이 거세지면서 이제는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으로 분열된 상태이다. 더이상 그들이 "독재정권"이라고 매도할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게되자(멀쩡히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억지부리는 것을 뺀다면) 이처럼 지상과제인 제1절대악의 격멸은 또다른 제2, 제3의 절대악의 설정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인간 공동체는 항구한 공동선이나 절대선을 향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생겨나는 새로운 절대악을 대항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공동체는 언제나 상응하는 반대집단이 있어야만 제대로 결집할 수 있으며, 그 반대집단이 사라진 이후에는 언제나 분열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류가 공동체 생활을 하는 한은 반목과 분열의 순환은 끊어질 수 없으며, 항구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다. 공동체의 생명이 공동선보다는 공동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은, 공동선으로의 도달보다는 공동악의 구축(驅逐)이 그 방법론에 있어서 훨씬 쉽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없던 것(선)을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있던 것(악)을 없애는 것이 더 편하며, 그 성과 또한 가시적이고 즉각적이기 때문에 정치세력은 언제나 공동선의 추구보다는 공동악의 구축을 더욱 효과적인 매커니즘으로 여긴다. 그러나 문제는, 절대악(혹은 공동악)의 구축이 반드시 절대선(혹은 공동선)으로의 도달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절대악의 구축과 절대선의 도달은 상호 배타적인 사건이 아닌 독립적인 사건이다. 절대악이 없는 상태는 그저 악의 부재일 뿐, 그 자체로 절대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빨갱이가 없는 사회가, 혹은 독재정권이 없는 사회가 그 자체로 절대선일까?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아주 깊은 착각에 빠져있음이 분명하다.

 

불미스러운 사건이나 제도의 모순이 발생하면, 인간은 사건 자체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제도를 보다 생산적으로 뜯어고칠 생각을 하기보다는, 가장 먼저 그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고 따라서 누구를 원망하고 비판해야하는지부터를 생각한다. 어떠한 사고가 일어났을때 정부가 관련 법안을 뜯어고치고 시스템을 개혁하여 다시는 그러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하는 데에보다는, 관련 책임자를 엄벌하거나 언론에 노출시켜 국민적인 지탄을 받게하는 데에 국민은 더욱 환호한다. 마치 검투사의 경기에서 끊임없는 육신의 단련으로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강한 검투사 개인에게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검투사가 사자를 죽였을때야만 환호하는 것과 같다. 이를 위의 논의에 적용해보자면, 사고의 책임자는 이를테면 하나의 집단에서 상정된 절대악이고, 그 책임자의 경질이나 처벌이 절대악의 구축에 해당된다. 허나 지금까지 논의한 바와가 같이, 절대악의 구축이 절대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따라서 책임자를 경질하고 처벌한다해서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공동악이 발생하면 그때그때마다 그것을 구축하는 것은 상당히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며, 공동악을 구축한 이후에는 상기 서술한 바와 같이 집단의 존재의의마저도 사라진다.

 

세월호 사태를 지켜보며

 

 

내가 공동체의 공동선과 공동악에 대해서 서술한 것은 이번 세월호 사태의 정부와 야권의 행태를 비판하기 위함이다. 정부는 유병언 일가와 이준석 선장을 절대악으로, 야권은 박근혜 정부를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서로 절대악을 구축하는 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는 그저 국민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기 위함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특히 야권은 최근 대선, 총선,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지속적으로 정권심판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는데, 정작 야권이 집권할 알수없는 미래에는 도대체 어떤 공동선을 목적으로 정책을 펼쳐나갈 것인가? 지금이야 비판할만한 반대집단인 "박근혜 정권"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근근이 지지세력을 결집하고는 있지만, 반대집단이 사라진 이후에는 그들 자신이 그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와 존재의의를 갖고 행위해야한다. 그저 집권세력에 대한 반감으로 지지세력을 하나로 묶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야당일때나 가능한 것이다. 세월호 사태 이후 야권이 박근혜 정권에 대한 수많은 비판을 연일 쏟아냈는데, 그 비판들 중 그 어떤 것에도 "만약 야권이 집권했다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은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대한 지속된 국민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야권의 지지율이 땅을 기는 것은 국민들의 야권에 대한 이러한 의심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의 야권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그들만의 아이덴티티 없이 존재해왔다. 야권은 야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反집권세력으로서만 존재해왔다.

 

또한 한가지 주목하고자하는 것은 국민들의 행태다. 유교권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민들은 전제왕정으로부터 벗어난지 이제야 한 세기가 지났고, 유의미한 민주주의 체제를 만끽한 것은 채 수십년이 되지 않았다. 따라서 체제나 제도 자체는 서구권 민주주의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에 올랐을지 몰라도 국민 정서나 인식만큼은 아직도 전제왕정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아직까지도 가뭄이나 기근이 일어나면 왕이 곤룡포를 벗어야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어찌됐든 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지도자도 한 명의 인간일 뿐이고, 국가의 대업이라는 막중한 임무에 대한 책임을 단일의 인간에게 모두 덮어씌울수는 없다. 입으로는 대통령도 국민이 뽑아준 선출직이므로 어떠한 특권도 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모든 일에 대한 책임만큼은 대통령 개인이 질 것을 요구한다. 언젠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 못해먹겠다"고 말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한국 국민들이 겉만 민주주의 시민이지 속은 기실 왕정국가 백성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 말의 적절성을 떠나서 어느정도 공감이 가는 말인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은 국가가 아니다. 영화 <변호인>에서 나온 말인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말을 많이들 인용하는데, 그 말에 따르자면 국가에서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책임 또한 국민 모두가 져야하는 것이 맞다. 국민 모두의 책임이라는 것은 단순히 지도자를 절대악으로 상정하고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불미스러운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시스템을 개정하여 공동선 도달을 위해 일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태여 공동악인 집권정당을 심판해야겠다면, 그것은 공동선에 도달하기 위한 제도적인 정비와 사태의 수습에 국민이 합심한 이후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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