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자유의지는 정말 합리적이고 자유로울까? 만약 인간에게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자유의지가 있다면 어째서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에 빠지는 사람들이 존재할까? 마르크스의 말대로 공산주의가 부조리한 자본주의의 최종 목적지라면 어째서 공산주의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까? 내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그리고 구축할 수 없는 보수성에 관한 것이다.

나는 먼저 관성의 법칙에 대해서 환기시켜보려한다. 정지해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있으려 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려 한다. 이 법칙은 인간의 사고와 행위에도 그대로 적응된다. 인간 또한 어떠한 사고와 행위의 양식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관성을 가지고있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러한 양식을 변화시키는 어렵다. 쉽게말하면 제 버릇 개 못준다는 것이다. 인간이 삶의 양식에서 관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 인간의 일관된 아이덴티티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이것은 그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하는 일종의 패러다임이 확립되는 과정이라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일관성"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는 달리 미시적인 측면에서의, 그러니까 해당 인간의 심리 내부에서의 일관성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한국의 보수세력은 엄밀한 의미에서 시장경제체제를 옹호하는 경제적 관점에서의 자유주의 분파인데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군사력의 증강과 반국가세력 척결 등의 다분히 현실주의적이거나 국가주의적인 성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것은 외적으로는 일면 일관적인 주장이라 하기 힘들지만, 으레 한국에서 보수세력이라고 칭하면 자연스럽게 이러한 성향을 가진 이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그들이 확립한 "내적인 일관성" 속에서 행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수세력 뿐 아니라 진보세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사회의 모든 사안을 자신의 내적인 패러다임(후술할때는 마이크로패러다임Micro Paradigm으로 지칭하겠다)의 관점을 통해 해석하며, 이러한 마이크로패러다임 때문에 그다지 경제/정치적인 문제와 관계가 없는 사안에 대하여서도 진보와 보수의 의견이 격렬히 맞서게 된다. 이를테면 보수세력은 동성결혼에 대하여 반대하고 진보세력은 찬성하는 것이 그들이 나뉘게 된 정치경제적 기준과 그다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많지 않을테지만, 실제로 그러한 논쟁이 좌우로 나뉘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외적으로는 일관되지 못한 존재라 하더라도, 자신이 내적으로 확립해놓은 마이크로패러다임에 대해서는 대체로 일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지금 논의할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사전적인 의미로 해석하자면 어떠한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순수하게 자유로운 인간의 의지라는 의미가 된다. 이 정의에 따르자면 자유의지는 반드시 일관적일 필요는 없다. 일관성에 대한 강박, 즉 마이크로패러다임 그 자체도 자유의지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외부기제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이 어떤 마이크로패러다임도 가지지 않은채 백지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태생적으로 진보이거나 보수인, 혹은 종교인이거나 무신론자인 사람은 없으므로), 마이크로패러다임 그 자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으로 확립된다고 볼 수 있지만, 일단 완성된 형태의 마이크로패러다임이 확립된 이후에는 그것에 위배되는 자유의지를 발현하기 힘들게 된다. 이것은 자기자신이 과거에 발현시켰던 자유의지에 대한 존중이자, 쉬운 말로는 자존심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평생을 성직자로 살아온 어떤 신부가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어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까? 마이크로패러다임을 부정하는 자유의지의 발현은 지난 시절의 자유의지의 총체적 결과물을 통째로 부정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고, 이러한 내적인 혁명을 감내할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따라서 인간의 사상과 행위는 대체적으로 마이크로패러다임의 범주 안에서만 맴돌게 된다. 자신의 과거 자유의지들의 총체가 자신의 미래 자유의지를 구속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속하는 일체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의지가 외부적 기제(그것이 자신의 과거 자유의지라고 해도)에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하기는 싫어한다. 한층 더 나아가 그들은 그들의 과거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그 벗어나지 못함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으로 여기고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점차로 그들의 마이크로패러다임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이를테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자신의 소중했던 사람이 요절하는 처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과연 신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심을 품는다고해도 곧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합리화하는 것과 같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는 순간 자신의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허망한 것을 믿어온 헛된 시간들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고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마이크로패러다임 속에 가두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마이크로패러다임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드러났다하더라도 그것을 비합리로 받아들이고 포기하는 것은 무척 어려움과 동시에, 이것은 그 사람의 내적인 결단력 차원의 문제이지 그 사람이 얼마나 더 배우고 덜 배웠냐는 합리성의 차원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합리성에 대한 확신이 크면 클수록 마이크로패러다임에서 벗어나기가 한층 더 어려워진다. 일본의 옴진리교, 한국의 JMS 등 심각한 사이비 종교에 교수나 의사 등 멀쩡한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버젓이 들어가있는 것 또한 바로 이것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과 지성에 대한 확신이 깊을수록 자신의 과거 선택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기는 더욱 어려워지며, 계속해서 의식은 보수화된다.

이 관점을 개개인의 입장이 아닌 거시적 패러다임(매크로패러다임Macro Paradigm)인 제도의 입장에서 보면 재미있다. 제도가 인간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가 존재한다는 인간의 "믿음"이 인간을 억압한다. 제도는 실질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모든 구성원을 직접 통제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 제도에 속한 구성원들이 그러한 제도가 있다는 것을 믿도록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한 믿음이 보편적으로 확립되고나면 제도는 자동적으로 사회에 정착되고, 오랜 기간을 존속할 수 있는 모멘텀을 갖게된다. 이를테면 음주운전을 뿌리뽑겠다해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모든 차를 검문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시범타만 제대로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줄때도 마찬가지다. 구태여 모든 학생의 숙제를 검사할 필요는 없다. 그저 안한놈 몇명 뽑아서 엎드려뻗쳐 시키고나면 그 이후에는 알아서 학생들의 뇌리에 "숙제는 좋든 나쁘든 하지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법과 제도라는 것은 구성원을 실질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매커니즘이라기보다는, 구성원의 마이크로패러다임을 법과 제도 중심으로 형성하게 하기 위한 관념체계인 셈이다. 제도가 개개인에게 옳은 것으로 여겨지든 아니든 사회의 논의는 분명 그 제도를 중심으로 형성될 것이고, 이것은 인간의 사유를 제도입안자들이 의도한 매크로패러다임에 종속되게 한다. 또한 역으로 매크로패러다임은 마이크로패러다임을 낳고, 마이크로패러다임은 인간 자유의지의 상실을 야기한다. 마이크로패러다임이 확립된 인간은 그것에 기꺼이 따르려고 한다. 그렇게 제도는 "일관되게 살려는" 인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 때문에 없던 제도를 탄생시키기는 수월하지만, 이미 있는 제도를 개혁하기는 쉽지가 않다. 구성원들의 이미 공고화된 마이크로패러다임을 파괴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의 논의를 빌리자면, 이러한 점 때문에 마르크스의 이론은 완전할 수 없다. 가령 마르크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장경제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현상(물론 소수이겠지만)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제도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신의 경제상황에 따라 사유의 행태를 결정할 수 있다고 단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합리성과 자유의지는 "제도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전제를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종속적이다. 먼저 인간이 외부 경제상황에 의거하여 자신의 행위와 사상을 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이크로패러다임이 확립되기 이전까지만이다. 이후에는 철저히 마이크로패러다임에 종속된다. 이를테면 부르주아지가 도박으로 한순간에 재산을 잃었다하여 쉽사리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지 못하듯 재산의 몰수가 사회의 발전방향을 공산주의 유토피아로 돌려놓지는 못하며, 한번 자본주의에 성공적으로 편입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이 이미 속해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지 않으려하기 때문에 이들의 마이크로패러다임을 파괴하는 것 또한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경제적 계급의 타파는 자연스러운 사회의 발전과정이 아니라 지극히 인위적인 과정일 수밖에 없고, 완전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알던 것에 의거하여 앞으로 변화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온 것에 의거하여 앞으로 머무를 방향을 결정하려고 한다. 따라서 자유의지가 진정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따금씩 우리가 너무나 자명하다고 믿어온 것을 손수 무너뜨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일관성"에 삶의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의 사상이나 의식이 수시 때때로 변화하는 것을 기회주의인 것 혹은 변절 등으로 여기고는 한다. 허나 자기자신이 믿어온 바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식 혁명의 단계이다. 그렇게 자기 속의 보수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완전한 자유의지를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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