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무언가를 "하지말라"는 말을 귀따갑도록 듣는다. 애초부터 사회규범과 법조차도 무엇인가를 하라고 장려하기보다는 무엇인가를 하지말라고 금지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왜 사회가 선의 장려보다는 악의 금지에 목을 메는지는 내가 이전에 쓴 글(http://aceferr.tistory.com/118)에서 논의된 바 있는데, 또 한가지 의문은 과연 수많은 악을 금지한 사회가 반드시 악하지 않은 사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이 명제가 참이라면 신정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의 사회악의 총량은 자유주의 사회보다 실질적이고 현저하게 낮아야하며, 공리주의적인 측면에서 국가의 가장 기초적인 임무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는 사회악을 구축하는 것이라는 것을 떠올려보면, 신정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야말로 궁극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잘 보장하는 체제라는 말이 된다. 또하나 쉬운 예시를 들자면, 이 명제가 참이라면, 청소년기야말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자유의 제한을 받는 시기이므로 청소년들의 범죄율이 타 연령대에 비해 낮아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 결론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제부터가 틀린 명제기 때문이다. 과연 많은 악을 금지하는 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악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가? 이따금씩 한가지 평범하지만, 평범하기 때문에 곧잘 무시되어버리는 인간의 본성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네 어머니들이 늘상 우리에게 쏟아내는 한탄처럼 "하지말라면 더 하고싶은"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에 의거하여 과연 사회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어떠한 금기사항들이 유의미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금기사항과 배덕감

인간이 군집생활를 시작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간 스스로가 자신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는 인간이 약간의 자유를 대가로 지불하고 좀더 항구적으로 보장된 자유를 누리기위한 매커니즘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허나 군집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의 군집이 관리/통제해야할 구성원의 수는 증가하는 동시에 구성원들 간의 이해관계도 복잡해지며, 동시에 법과 제도의 역할 또한 증대되면서 군집이 그 구성원들에게 헌납하도록 요구하는 자유의 범위는 더욱 커지게된다. 나는 이것을 "금기사항이 많아진다"고 표현하겠다. 이를테면 종교의 경우, 초기에는 공동체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윤리의 기준으로서 법의 신성성과 절대성을 강조하는 역할만을 담당했지만, 점차 종교가 통제해야만하는 사회가 거대화/복잡화되면서 지역/민족마다 저마다 다른 특수한 교리를 갖게 되었고, 심지어는 같은 종교라도 시점에 따라 새로운 교리가 수시로 추가되기도 했다. 가령 창세기에서 롯이 자신의 두 딸과 근친상간을 하는 장면이 버젓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십계명에는 "간음을 하지말라"는 항목이 등장하여 모순을 만들어내는 것과, 이슬람교에서 돼지고기의 식육행위를 금기로 삼은 것 또한 공동체가 금지시킨 금기사항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공간에 따라 상대적이며, 지속적으로 확대재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기사항이 많아질수록 인간이 포기해야할 자유는 사회계약론에서 제시한 것(자연법에 의거한 금기사항)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게되며, 수많은 금기사항을 재생산해내야만 하는 공동체는 각각의 금기사항을 "왜 하면 안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어진다. 이에 공동체는 이성적인 설명 대신 감정적이고 추상적인 세뇌를 통해 금기사항을 정당화하는데, 이것은 결국 해당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사상에 대한 순환논리로 이어진다. 마르크스주의를 예로 들자면, 왜 무산계급이 무산계급이라는 이유만으로 유산계급을 제치고 집권의 정당성을 갖게되는지를 설명하자면 필연적으로 "유산계급은 악"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센트럴 도그마에 이르게되며, 이 도그마에 대한 반론은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금기사항에 대해 연이은 물음표를 제시하는 것은 공동체의 근간사상을 흔드는 행위로 규정되어, 한마디로 "묻는 것조차도 금지된 사회"를 만들곤 한다. 이처럼 금기사항이 많은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는 심히 교조주의적이고 경직적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자신의 의식과 신체를 억누르는 일체의 억압기제로부터 해방되려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향해가는 존재이다. 공동체는 철저히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와 "공동선"을 향해가는 공화주의에 의해 운영되지만, 개인은 철저히 자유주의적으로 행위한다. 즉,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공동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목표(엄밀히 말하면 공리주의 공동체의 지상목표는 개인 자유의 극대화이니 상호모순이긴 하지만)인 반면, 인간은 공동체의 이익이야 어찌됐든 자신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 이득이다. 더욱이 인간이 기꺼이 포기하려하는 자유는 사회계약설에서 제시한대로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한 대가 정도가 한계인데, 공동체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자유가 이 정도를 넘어서면, 다시말해 금기사항이 많아지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억압상황으로부터 해방되고자한다. 이 본능이 의식적인 행위로 표출될 때에 인간은 일종의 쾌락을 느끼게되는데, 사회가 규정하는 자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금기로부터 벗어났을 때에 느끼는 쾌락이 바로 배덕감이다. 이 배덕감은 생각보다 굉장히 막강한 쾌락이다. 그것은 단순히 사회적 윤리(라고 불리우는 금기사항)를 어긴 데에 대한 일종의 정복감일 뿐 아니라, 자신을 옭죄어오던 거대행위자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이며, 수많은 제도로 억압되어왔던 자신이 독립된 단일행위자로서 무엇인가를 해내었다는 우월감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금지된 무언가"에 대해,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살면서 손도 대지말아야할 것"이라고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가슴으로는 일어나는 호기심과 선망감을 버릴 수 없다. 더군다나 공동체에서 규정하는 금기사항이 많아질수록 배덕감을 느낄 기회와 정도는 더욱 증대된다. 이러한 개인들의 "배덕감으로 인한 불법행위"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처벌의 고통이 배덕감보다 더 커야하는데, 애초에 공동체가 자의적이고 교조주의적으로 만들어낸 금기사항에 대하여 엄격한 처벌을 규정하기에는 그 정당성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이 때문에 금기사항이 많은 사회라고해서 그 사회가 더 선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러한 사회에서도 범법행위가 끊이지를 않는 것이다.

 

금기의 모순

"코끼리를 생각하지말라"고 하면 사람은 그 즉시 코끼리를 생각하게된다. 이처럼 인간은 무엇인가를 금지당했을 때에, 그것이 금지되었다는 실체적 사건보다는 금지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하다. 금지 그 자체보다는 금지된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금지된 그 행위"는 "해서는 안되는 것"이 되고, "해서는 안되는 것"은 "앞으로 해보지 못할 것"이 되며, "앞으로 해보지 못할 것"에 대한 인간의 궁금증은 막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한 시절동안 금서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그 재미없고 딱딱한 책이 그렇게 많은 대학생들의 손에 읽혀질 수 있었을까? 배덕에 대한 호기심은 금기사항이 자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일수록, 금기사항을 어긴 데에 대한 처벌이 커질수록 증대된다. 또 배덕에 대한 호기심이 커질수록 배덕을 실체적 행위로 옮겼을때 느끼는 배덕감 또한 증대된다. 굳이 금기에 대한 배덕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금기사항은 종종 풍선효과를 야기하는데, 배덕감이 금기사항을 "직접" 실행함으로써 느끼는 만족이라면, 풍선효과는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금기사항과 유사한 행위를 하며 대리만족을 느끼다는 점에서 풍선효과 또한 배덕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측면에서 보면 어떤 자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금기사항도 그 행위를 완전히 근절시킬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 금기가 배덕감으로 인해 더욱 인기있게 되거나 사회 여타 부문에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풍선효과가 발생한다. 따라서 특정 사회에서 자의적이고 독단적으로 악(惡)이라 규정하는 사회악의 총합은 그 사회의 금기사항의 수와는 무관하다.

 

특히 금기사항이 인간의 본능과 연관되어 있을 때는 이러한 배덕감은 배가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수많은 욕구 중에서도 금기와 가장 연관이 깊은 욕구는 바로 성욕이다. 가령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하면 양고기나 닭고기를 먹으면 그만이듯 식욕은 그다지 금기에 대한 반발심이 크지 않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대체재도 많지만, 성욕은 금기 그 자체에서 오히려 증대되는 경향을 가진다. 이를테면 세기의 로맨스인 <로미오와 줄리엣>부터가 금지된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멀리 보지않더라도 한국의 수많은 드라마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사랑을 애틋하게 표현한다. 좀더 적나라하게 음란물의 예시만 보아도 미성년자나 가족간의 금기된 관계를 다루는 작품(?)이 판을 친다. 이것은 일면 성욕이 여타 욕구와 구별되는 특수한 특성(http://aceferr.tistory.com/92 참조)인 "자기선택성"을 지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해소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타 욕구(식욕, 배설욕, 수면욕 등)와 달리 성욕은 완전히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과 더불어 금기시되는 상대와의 사랑은 배덕감까지 배가되기 마련이다. 완전한 자유의지를 통해 사회적 억압에 대항하여 금지된 사랑을 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인간의 욕구와 배덕감을 극대화시켜 "자기를 억압하는 사회로부터의 해방감"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정도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이러한 배덕감과 해방감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된다. 개인의 자유의지가 개입되는 고차원적인 욕구는 대부분 성욕만큼은 아닐지라도 배덕감에 일정정도 비례한다. 누차 말하듯, 억압이 커질수록 해방감 또한 마찬가지로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말라면 더 하고싶다

무언가로부터의 "자유"와 "해방"라는 것이 인류가 향해야할 지상가치적인 요소로 여겨지지만, 금기사항이 많아질수록 이러한 자유와 해방감은 오히려 그릇된 방향으로 표출될 여지가 생겨난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이슬람 율법으로 음주를 강력하게 통제하지만, 이로 인해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술을 마시고 오거나 하루종일 커피를 입에 달고사는 경우가 많다. 무엇인가를 금지하는 법이 생겨나면 그 법을 피하는 편법이 생겨나고, 그 편법을 금지하는 또다른 법이 생겨나면 또다른 편법이 생겨난다. 그야말로 금기사항이 계속해서 확대재생산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인 것이다. 인간은 물풍선과 같다. 손아귀에 강력하게 쥐려해도 결코 풍선안의 물의 부피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세게 쥐면 세게 쥘수록 손아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물풍선 부분은 더 커지고, 이내는 터져버리게된다. 이처럼 금기사항은 공동체가 구성원을 통제하는 데에 있어서 그다지 효율적인 방안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무엇인가가 문제가 되면 그것을 금지시켜버리는 데에 이력이 나있다. 그리고서는 그러한 금기사항을 어긴 것에 대해 구성원의 도덕의식만을 비판한다. 진정 민주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어떤 논의도, 그것이 자연법적인 측면에서 절대적 비도덕이 아니라면, 금기시되어서는 안된다. "말할 가치조차 없는" 혹은 "말해서는 안될" 논의 같은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정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완구 아들 병역 문제에 대해  (0) 2015.01.26
마이크로패러다임과 자유의지  (0) 2014.08.04
공동체와 악  (0) 2014.06.11
사상과 시간  (0) 2014.02.16
조직의 합리성와 부조리  (4) 2014.01.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