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불합리한 지시를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절친한 친구와 술자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는 같은 학교 공대에 다니며 최근 모 대기업 인턴 면접에 합격한 녀석이었는데, 면접관이 "만약 상사가 당신에게 사적인 심부름을 시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공세를 해왔다고 한다. 대개의 면접자들은 乙로서, 슈퍼甲인 면접관의 귀에 달콤하게 들리는 말만 해야하기에 나는 그 질문을 받은 90% 이상의 면접자들이 "시키는대로 할 것"이라는 대답을 했을거라 확신한다. 아마 사적인 심부름은 질문의 강도가 너무 약했을런지 모른다. 상사가 당신에게 한겨울 한강물에 빠져죽으라면 어떻게 할것인가 나 상사가 당신의 여자친구를 넘본다면 어떻게 할것인가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면접자들의 고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텐데, 이쯤되면 그 면접관들은 상당히 상냥한 질문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대 혹은 3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청춘들. 가슴 속에는 드넓은 이상과 세상을 바꾸고자하는 포부를 갖고 취업전선에 갓 뛰어든 면접자들은 아마도 "시키는대로 할 것"이라는 대답을 하고나서도 자신의 변해버린 모습에 대해 끊임없이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살자는 현실에 점점 영합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에 질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이렇다할만한 사회생활을 군대밖에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줄곧 어떤 일들이 벌어지면 "군대에서는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하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크게 틀린 적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대한민국의 어떤 조직에 편입되더라도 그 조직문화는 군대와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으며, 심한 경우 군대식 그 자체로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군대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일부 대학교의 새내기들, 체육과 학생들, 여초사회, 더 나아가 중고등학생들조차도 병영사회와 매우 흡사한 자신들만의 "계급질서"를 구축해놓고서는 철저한 상명하복을 강요하고 있다. 정작 계급과 상명하복의 근원지인 군대는 그러한 모습을 겉으로라도 없애고 최대한 말랑말랑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에서는 군대식 문화가 아직까지도 만연해 있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군대식 문화가 나쁘다 좋다는 가치판단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런 이야기를 해봤자 군대식 문화는 폐지되어야한다는 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나 나오는 뻔한 소리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글픈 이야기지만, 유교적 관념이 뿌리깊게 박힌 한국사회의 특성상, 군대식 문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있음에도 이를 없애기는 쉽지 않다. 장유유서 정신을 아주 철저하게 반영한 군대식 문화는 유교사회 한국에 상당기간 존속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사회의 군대식 문화를 어쩔 수 없는 요소로 일단 받아들이고, 개인이 이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현명할지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동화와 합리성의 변화

어떤 사람이 어떤 조직에 들어갈 때는 그 조직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겠다는 포부가 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은 조직에 동화되기 시작하고, 어느새 자신도 그 조직의 일원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군대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이등병들은 수많은 갈굼과 잔심부름 세례를 받으며 자신이 선임병이 되면 이러한 부조리를 후임들에게 저지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불과 1년이 지나 상병이 되고나면 자신들이 가장 싫어했던 선임의 모습을 그대로 닮게 되고, 자신들이 했던 잔심부름들을 자신의 후임에게 그대로 시키고 있다. 제아무리 거대하고 큰 포부와 이상을 안고온 자라 할지라도, 일단 조직에 동화되고나면 자신도 조직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내가 이만큼 당했으니 너도 이만큼 당해봐라"는 식의 피해의식 표출이라고만 매도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조직에 한 번 동화되기만 하면 자신의 이상이나 포부 따위는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나한 존재여서 그럴까?


잠시 분위기도 풀어볼겸 나의 군대생활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나도 군대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갈굼(...)을 받아왔는데, 계급별로 그 갈굼이 나에게 와닿는 느낌이 매번 달랐다. 자대에 막 배치받았던 짬찌끄레기 이등병 시절에는 선임들의 욕이 난무하는 갈굼들이 무서웠고, 일병 때는 그러한 갈굼이 일상화가 되자 "아 저 새X 또 지랄이네"하며 짜증이 났으며, 상병이 되었을 무렵에는 "씨X 나도 이제 군생활 할만큼 했는데"하며 선임들의 갈굼에 화가 났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내가 점차 업무에서 사수 역할을 꿰차고 생활관과 분대에서는 최고참의 서열에 가까워질수록 그 모든 것들을 돌이켜보면 서서히 "이해"가 가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일례로 나는 아주 운좋게도 이등병 말에 부사수를 받게 되었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연대장 교육도 채 하지 않은 신병이었던 내 부사수를 데리고 PX를 갔었다(이등병 선임이 허락도 없이 후임데리고 PX에 가는 것이 군필자 분들은 얼마나 큰 갈굼거리인지 알 것이다). 1년 선임이었던 내 사수는 30분을 부대를 뒤져봤지만 나와 내 부사수를 찾지 못했고, 이등병 2명이 소리소문 없어진 연대본부는 발칵 뒤집어졌었다. 30분만에 PX에서 나를 찾아낸 내 사수는 먹고있던 음식을 모두 뒤엎어버리고 나를 데리고나가 내가 그때까지 평생 들었던 욕의 3분의 2정도를 해댔다. 후임 시절에는 "후임 들어와서 먹을거 사준게 그렇게 죄인가" 싶을 정도로 그 선임에게 섭섭했었고, 그 이후에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심 그날의 섭섭함을 잊지 못하고 지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게 되었다. 과연 내 이등병 후임이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는데 PX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어떨 것인가? 어느샌가부터 나는 그때의 나 자신을 갈구고 있게 된 것이다. 솔직히 나같으면 욕으로 안 그치고 때렸을 것 같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사람의 합리성은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조직에 동화된다는 것은 결코 부조리에 편입되는 것만 뜻하지는 않는다. 동화란 조직의 특수성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가령 바깥세상에는 법규가 있지만, 회사 내부에는 또다른 내규(혹은 사규)가 있다. 바깥세상에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아닌 일을 회사 내적으로는 문제로 삼고 처벌하는 것이다. 그만큼 제3자의 눈으로 보는 조직과, 조직 내부에서 보는 조직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특수한 조직일 경우 그 정도가 더 심해진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공공복리를 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표출할 권리가 있지만, 국가정보원의 요원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거나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이는 공공복리를 해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문제가 된다. 분명 국가정보원 요원도 대한민국 국민이므로 정치적인 견해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어야 맞지만, 조직의 특수성 상 그러한 자유가 제한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바깥세상의 잣대를 조직내부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조직에 편입되기 전에는 그 조직의 부조리가 부각되어 보이고 그 부조리해 보이는 것들이 모두 타파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되지만, 막상 그 조직에 동화되고나면 그런 것들이 대개 "이유가 있다"고 느끼게 된다. 조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의 합리성과 조직의 특수성을 알게된 이후의 합리성은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조직에 동화되어 자신이 예전에는 불합리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지금은 자기의 손으로 직접 하고있다는 점에 회의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것은 피해의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합리성이 바뀌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부조리와 개혁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의 특수적 합리성은 한계를 가진다. "특수성"만을 강조하다보면 조직 내부의 부조리에도 특수성이라는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다. 조직의 효율증진을 위해 예외적인 것으로 인정 혹은 제한하던 것이 오히려 조직의 효율을 떨어뜨리는 것이 부조리이다. 이 부조리가 커지다보면 조직 내부에서도 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리 불합리한 부조리가 조직 내부에 만연해있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합의된 개혁안이 없는 이상 이 부조리는 합리성의 일부로 보아야한다.


가령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상사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안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상사에게 벌점을 부과하거나 징계를 내린다던지, 아니면 상사와 부하직원들 간 근무공간을 분리시키는 것이 그 예시이다. 조직의 부조리에는 항상 이렇게 여러가지 개혁안이 제안되기 마련인데, 개혁안이라고 해서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상사에게 징계를 부과하는 개혁안 예시의 경우, 상사로서 부하직원에게 정당한 업무지시를 내렸음에도 부하직원이 이를 악용하여 사적 심부름으로 규정하고 상사의 징계건의를 할 가능성이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들 간의 근무공간을 분리시키는 개혁안 예시의 경우, 업무상 소통이 현저히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개혁안의 부작용들이 부조리로 인한 효율저하보다 크다면, 부조리가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것이라도 해당 시점에는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해야한다. 쉽게 말하면 합리적이고 합의된 대안이 없는 부조리는 그 자체로서 합리성이라는 것이다.


이는 합의되지 못한 개혁안보다는 규탄받는 부조리가 더 낫고, 동의를 얻지 못한 혁명보다는 차라리 기존의 전통에 의해 구축된 합리성이 더 믿을만하다는 입장이다. 구성원의 합의와 동의를 얻지 못하고, 그 부작용에 대해서 심히 의심되는 개혁안은 또다른 부조리를 낳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이는 차라리 개혁을 하지않은 것만 못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개혁이란 조직 전체의 합리성을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구축되는 새로운 합리성 또한 조직 전체의 합리성이기 때문에 조직구성원들의 신뢰와 지지를 기반으로 해야한다. 즉, 아무리 부조리에 대한 개혁안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조직내부 구성원들에 의해 동의되지 못한다면 부조리나 다를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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