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이후로 크게 위축된 종교
기독교 신정(神政)이나 다를바가 없었던 중세시대가 끝나고 인본주의적인 문화가 꽃피우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종교의 힘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어왔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를 무릎꿇게 만들었던(카노사의 굴욕) 교황의 권위는 현대에 이르러 형식적인 카톨릭의 아이콘 정도로 그 실질적인 권한이 대폭 축소되었고, 종교라는 명분 하에 교황이 직접 통치하는 직할령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면적을 가진 바티칸 시국(이슬람계 신정국가를 제외한다면)으로 쪼그라들었다.
세속의 모든 질서를 종교의 휘하에 두었던 중세시대가 과학사적, 사상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암흑시대라는 소리를 듣게된 원인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요인을 손꼽는다면 바로 "종교는 비판과 토론을 허용치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사사로운 교리 구절에 대한 해설이나 각주 같은 것들은 시대마다 혹은 종파마다 조금씩 상이할 수는 있지만, 해당 종교의 근본을 이루는 도그마에 대해서 종교는 한치의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종교의 핵심교리는 "유일 진리"이며, 종교의 모든 논의와 신앙심은 그 핵심교리를 진리라고 신봉함에서 비롯된다. 과학의 경우, 언제나 비판가능성이 존재하기에 과학의 패러다임은 항상 변화한다. 지금 시점에 100년 전, 아니 불과 5년 전 논문만 보아도 현대의 관점에서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정설이라고 여겨지는 학설이 10년, 100년 후에는 근거없는 도시전설로 전락할 수도 있고, 과학자들은, 아니 심지어는 이론을 주장한 당사자마저도 자신의 이론이 언젠가는 무너질 것임을 예상하고 인정한다. 물론 인간적으로 화가 나고 자존심이 상하는건 다른 문제다 그러나 종교의 경우, 가령 기독교 계통을 살펴본다면 수천년도 더 전에 쓰여진 구약성서를 지금까지도 진리로 신봉하고 있다. 이는 카톨릭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유대교, 심지어는 이슬람교에서조차도 구약성서를 부차적인 읽을거리교리로 인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종교계는 지동설을 새로이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소모적인) 세월을 허비했으며, 진화론의 경우에는 심지어 아직까지도 인정하고 있지않다. 그렇기에 과학이 늘 신선한 흐르는 물과 같다면, 종교는 썩을 수밖에 없는 고인 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도 영향력이 대단한 종교. 그 이유는?
그러나 종교라는 고인 물의 힘은 그 위세가 상당히 쪼그라든 현대에 이르러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종교의 힘의 원천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우월감"과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고귀한 정신세계와 사고체계라는 것이 영혼이 아닌 두뇌의 호르몬 화학작용과 시냅스간 찌릿찌릿한 전기신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그렇게되면 나의 이 고귀한(?) 정신작용이 물이 얼음이 되는 것 따위나 같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뭐그리 대단한 정신작용을 하며 산다고... 또한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신체의 생물학적/물리학적/화학적 기능정지이고 따라서 내세에서의 영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애초에 저 먼 옛날 우가우가하고 있을 신석기 시절부터 생겨난 토테미즘 같은 원시적인 종교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었고, 사회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 현대에도 수명만 늘릴 수 있을 뿐 죽음 자체는 피할수가 없기에 종교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인생살기 힘들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면 완전한 무(無) 상태가 되는 것이기에 이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종교에 기대는 것이다. 이 두가지 힘의 원천은, 거의 모든 종교의 교리에 대한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반박이 가능해진 현대에 이르러서도 종교를 믿는 인구가 종교를 믿지 않는 인구를 초월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종교를 자꾸 과학과 비교해서 논지가 흐려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종교-정치 관계도 종교-과학 관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종교는 "교리와 다름"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처녀생식 따위가 어딨냐며, 마리아가 예수 낳은 것은 처녀잉태가 아니고... 라는 말을 했다가는 그 사람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기독교계 종교로부터 수많은 돌팔매질을 당할 각오를 해야한다. 모두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재하는데 왜 혼전순결을 지켜야하느냐는 질문을 했다가는 이번에는 이슬람 세력들에게 칼질을 당할 각오를 해야할 것이다. 아무리 비판에 대한 근거가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라고 해도, 종교는 교리와 다르면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말인즉슨, 종교야말로 전체주의를 실현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실례로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와 게르만우월주의는 그 근거와 주장 자체가 종교 교리와 매우 흡사그 말은 한 마디로 말도 안된다는 뜻하다. 스탈린 소련과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세습체제의 북한만 보아도 국가적인 지도자 우상화를 실시하고 있다(윗동네의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는 이야기에 비하면 스탈린은 많이 양반이긴 하지만). 전체주의가 국가적으로 실시되지 않으면 종교이고, 종교가 국가적으로 실시되면 전체주의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종교의 특성은 실상 정치사상적으로도 민주주의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한 장애요소가 된 것이 사실이다.
종교인(사제)의 권한
지금껏 거시적으로 종교가 위축된 배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갖게된 이유, 그리고 종교의 과학/정치에 대한 탄압적 역할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미시적으로 성당(혹은 교회) 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위에서도 말했지만, 종교는 핵심교리를 "진리"로 규정한다. 이미 진리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론이나 반박은 있을 수가 없다. 수십명의 신도가 모이든, 수만명의 신도가 모이든, 수억명의 신도가 모이든 그 신도들은 이 "진리"에 대한 반박을 할 수 없다. 즉, 종교 시스템은 상부 구조(핵심교리)에서 하부 구조(신도)로 가는 커뮤니케이션은 아우토반마냥 활짝 열려있지만, 하부 구조에서 상부 구조로 통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전무하다는 것이다. 종교라는 시스템의 하부 구조인 신도들은 그저 상부 구조인 진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종교 시스템의 상부 구조인 핵심교리는 그 자체로는 어떤 강제력도 없고, 전파력도 없다. 성경이 뚜벅뚜벅 걸어서 직접 사람을 찾아가거나 자기 몸에 쓰여진 글을 읽어주진 않잖아? 그렇기에 종교 시스템의 중간 구조에는 항상 종교인(사제)이 존재한다. 상부 구조에서 하위 구조로의 커뮤니케이션만 있는 종교의 특성상, 실질적으로는 중간 구조인 사제야말로 하부 구조(신도)를 통제하는 계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권한은 생각보다 매우 대단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핵심교리(성경 등)를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신도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구약성서 창세기에서는 롯이 자기 두 딸과 근친상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제가 이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아내가 없는 상황에서 남자는 자신의 딸과 성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설법한다면, 신도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결국 그것이 신의 뜻인양 받아들이게 된다. 어떤 용감한 신도가 "아무리 그래도 근친상간은 사회 윤리를 해치는 것이다"라고 반박한다고 해도, 사제는 "성경에 이렇게 나와있음 ㅇㅇ"이라고만 하면 된다. 물론 사제들의 자의적인 교리 해석 등은 해당 종교계에서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겠지만, 성경이 어디 1~2년된 물건인가? 수천년이 지난 물건이니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사항도 많고, 그 내용 자체가 비현실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지다보니, 이 구절은 이렇게 해석해라 저 구절은 저렇게 해석해라 하는 지침 자체가 전무하다. 따라서 사제들은 교리를 자기 입맛대로 해석하여,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한 것들을 신도들에게 "진리"라는 명분으로 전파할 수 있다. 물론 어지간히 사리에 밝은 평신도가 아니라면 사제가 하는 말이 정말 진리인지, 아니면 사제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인지 눈치채기 쉽지 않다. 설사 사제의 설법이 잘못되었음을 눈치챈다하더라도, 위에서 설명했듯 종교는 하부구조에서 상부구조로 어떤 비판이나 반박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던가, 아니면 신도가 종교를 떠나는 수밖에는 없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사태와 종교의 국가적 역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소속 신부 일동이 부정선거 당선범 박근혜 퇴진이니 천안함 사태에 대한 음모론, 연평도 사태에 대한 한국 책임론이니 하는 것들을 제기하며 시국미사에 나섰다. 이 구호 자체로만 보자면 여타 좌파 단체들과 크게 다를바가 없지만, 그 주축이 종교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종교인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한다. 종교와 종교인의 영향력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무시무시하다. 위에서 설명했듯, 특히 종교인은 "신"이라는 미명 하에 자신의 생각을 진리인 것처럼 전파할 수 있는(게다가 반박도 허락하지 않는다) 권한을 갖기 때문에, 정치적 중립 문제에 대해서 숙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무리의 양떼를 이끄는 목자가 나침반이 시키는대로 양을 이끄는 것이 아닌,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양을 이끈다면 그것은 목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물론 종교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치상황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 정치중립은 아니다. 심각하고 중대한 국가적 위기가 발생하면 종교인들이 국가의 원로로서 국민을 안정시키고 통합시키는 데에 큰 역할과 조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천안함의 경우에는 이미 북한 소행으로 수사결과가 나온 사실이고 이는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인정한 바 있는, 도저히 반박조차도 불가능한 사안이다. 국정원 댓글사태의 경우에도 박근혜 대통령과 직접적인 커넥션이 밝혀진 바는 없다. 백번 양보하여 천안함 사태가 음모론이고(이런 가정을 하는 것 자체도 씁쓸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부정으로 당선되었다 치자.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 사태를 NLL에서 해상훈련을 한 한국의 책임이라고 돌리는 것은 명명백백한 그들의 "사견(私見)"이다. 이들이 나와서도 당당하게 이런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보니, 정작 자신들의 성당에서 어떤 미사를 주도했을지는 직접 보지않아도 훤히 알 것 같다.
레닌이 한 말 중, "종교인 한 명을 포섭하는 것이 일개 사단을 창설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다"는 말이 있다. 종교인은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성인(聖人)이나 사회로부터 존경받는 원로가 될 수도, 혹은 일본 지하철 사린가스 사태 때의 옴진리교나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처럼 테러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종교의 전체주의적이고 비이성적인 면모가 악기능이라면, 인간에게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우월감"을 갖게 해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종교의 순기능이다. 이 순기능이야말로 종교의 필수적인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만이 할 수 있는 이 두가지 순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악기능을 더욱 부각시켜 대중을 선동하고 사제들의 사견이나 퍼뜨리고 앉아있는다면, 과학시대/현대시대/민주주의시대인 지금 시점에 종교가 남아있을 가치 따위는 없다.
'정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대중에게 고함 (41) | 2014.01.11 |
---|---|
자본주의에 대한 변호 (0) | 2013.12.25 |
지지와 신뢰: 보수의 위기 (1) | 2013.08.18 |
재무장하는 일본 (3) | 2013.07.22 |
발산경쟁체제 (0) | 2013.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