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묻지마, 일본
일본 아베 신조의 자유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둠에 따라 일본 극우세력이 그토록 외쳐왔던 집단자위권(동맹국이 공격받을시 일본이 참전) 도입, 자위대의 국방군 승격, 평화헌법 개헌이 현실화될 위기에 처했다. 단순히 일본의 이러한 행태를 비판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다. 어차피 국가란 국익을 목표로 한다면 도의 따위는 버리게 된다. 독일이 과거사를 사죄한 반면 일본은 과거사를 사죄하지 않지 않았느냐고 비판해도 어쩔수가 없다. 독일의 경우 2차대전 패전 이후 영국/프랑스/소련/미국에게 공동으로 관리되어 과거사가 비교적 말끔하게 청산된 반면, 일본의 경우 2차대전에서 사실상 적대국은 미국밖에 없었고, 따라서 종전 이후에도 미국 단일국가만의 관리를 받았기 때문에 과거사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것이다.
왜 미국은 일본의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가?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저 <국화와 칼>에 의하면, 일본인은 항복 대신 자결을 택하는 가미가제와 반자이 돌격 등으로 유명했지만, 패전 이후 일왕이 무조건 항복선언을 하자 놀라울 정도로 미 군정에 충성했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하고많은 이유 중 일부일뿐이겠지만, 군국주의 시대에 양성된 엘리트들을 모두 갈아치우고 미국이 새로운 엘리트를 양성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미국이 일본을 봐준 것이 아니다. 미국이야말로 진주만 기습(1941)으로 인해 일본에게 가장 적대감을 갖고 있는 국가 중 하나였다(원래 원폭투하예정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외에 수 곳이 더 있었음). 과거사 청산은 효율성 논리에 의해 흐지부지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내 말은 일본의 행위를 합리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국가에게도 국격이 있다. 전후사정이 어찌 되었든 간에 독일은 총리가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유태인에게 사죄하고 여전히 피해자들에게 보상책을 마련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종전 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갖가지 망언을 일삼고 있다. 독일이 나치와 관련된 단체와 표식 모두를 불법화하는 동안, 일본 해상자위대는 욱일승천기를 아직까지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70년이나 지난 일이기 때문에 사죄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달리보면 70년동안이나 주변국과 갈등을 유지하면서까지 사과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국격을 의심하게 하는 바이다.
냉전기의 일본
위안부 망언이니 침략행위 합리화니 비판하는 것 좋다 이거다. 내 말은 그렇게 해봤자 씨알이 먹힐 때가 있고, 씨알이 먹히지 않을 때가 있다. 일본이 무엇 때문에 주변국과의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과거사를 이고 가는가? 언뜻 생각해보면 과거사 따위 얼른 털어내버린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은데, 반드시 그런것도 아니다.
원래 2차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일본은 그 패권이라는 것을 경제나 문화 등 소프트 파워를 통해 비교적 "조용하고 부드럽게" 추진해왔다. 그도 그럴것이 소련 붕괴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의 구도는 소련-중국-북한을 위시한 공산권과 한국-일본-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이 상호 세력균형을 나름 형성한 상태였다. 이렇게 정세가 이분화된 구도에서 한국-일본-미국의 국익은 상당히 일치하는 성향이 짙었다. 즉, 일본이 굳이 재무장하며 욕을 들어먹지 않아도, 일본의 국익이 미국의 국익이요, 미국의 국익이 곧 일본의 국익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경쟁에서 미국에게 편승하기만 하면 됐다. 달리 말하면, 일본은 안보문제는 미국에게 전가하고 자신들은 경제성장에만 집중하면 되는 호기였던 것이다.
현대의 일본, 중국 vs 미국-일본 구도
i) 중국 눈치보는 미국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도 개방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냉전기의 이분구도는 다원화되기 시작한다. 동아시아는 더이상 이데올로기의 각축장이 아니게 되었고, 러-중-북한과 한국-일본-미국의 동맹관계도 거진 약화되기 시작했다(이미 러-중은 50~60년대 중소분열 시기부터 동맹이 와해). 쉽게 말하면 팀전이었던 상황이 개인전으로 변모했다. 중국은 어느샌가 세계경제질서에 편입하여 미국과 적대국이 아닌 협력국이 되었다. 일본은 주변국인 한국, 러시아, 중국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며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예전처럼 미국이 나서기가 쉽지가 않다. 한일 영토분쟁의 경우 한국도 미국의 동맹국가이기 때문이고, 중일 영토분쟁의 경우 커져가는 미중협력 때문에, 러일 영토분쟁 또한 러시아가 공산노선을 폐기하고 미국과 친선관계를 확립함으로써 일본이 그토록 의지해오고 편승해왔던 미국이란 안보방패에 더이상 의존할 수가 없게 되었다. 미국은 "아 서로 좋게좋게 해결해나가라 ㅃㅇ" 하며 일본의 얼굴을 피하기 시작했다.
ii) 그래도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 그 대타로서의 일본
그러나 아무리 미중관계가 협력관계로 변모했다고는 해도, 중국은 명실공히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국가고, 미국은 중국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 중국이 "급부상하는 도전세력Rising Challenger"이고 미국이 기존 "패권세력Hegemony"이라 패권경쟁은 불가피한데, 한편으로 미국은 중국과 협력도 해야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런데 일본이야말로 중국견제에 있어서 미국의 좋은 대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이 재무장하는 데에 대하여 미국은 강경하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이 또한 아까 말했듯이, 미국이 일본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일본이 재무장하여 중국을 견제할 능력을 갖게되면, 미국 입장에서는 ① 중국에게 우위를 선점하거나, ② 일본에게 중국견제의 책임을 모두 전가하고 미국은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될 수 있고, ③ 나아가 중국견제의 책임을 일본에게 전가하면 미중관계에서 마찰이 줄어들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애초에 일본이 핵무기 개발의 원천기술인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개발하도록 미국이 묵인해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일본이 이전과 같이 미국에게 도전할 생각(2차대전)만 하지 않는다면 일본의 핵무장은 어느 정도 미국이 묵과할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cf) 한국 핵무장의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일본은 중국과 명확한 경쟁관계에 있다. 그러나 한국은 명시적으로는 미국-일본과 우방이지만,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만을 놓고본다면 여전히 국민정서 자체가 "그래도 왜놈보다는 짱깨그래도 일본보다는 중국"이라는 친중성향(이라고 쓰긴 뭐하지만 달리 쓸말이 없다)이 "비교적" 강하기 때문이다 - 친중국가라는 게 아니다. 한마디로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완전히 신뢰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곳이다. 노무현 정권의 전략적 호구균형자론과 반미탈미정책이 그러한 미국의 불신감을 더욱 강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iii) 일본의 다급함
그러나 일본이 가진 시간은 한계가 있다. 즉, 이때가 아니면 안된다. 일본 입장에서는 중국이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 및 배치하고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이전투구의 장에서 재빨리 재무장의 호기를 잡는 것이 급선무다. 냉전기 미소가 그나마 별다른 군사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서로의 패권과 영향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했기 때문이고, 그 패권이 어느정도 안정화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의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은 아직 고착화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경쟁 중이다. 그러나 미중의 패권경쟁도 언젠가는 안정화 및 고착화될 것이고, 그 상황에 이르면 미국-중국 간 세력균형이 형성되기 때문에 더이상 일본이 재무장할 빌미를 찾을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미중의 패권경쟁은 이전 미소냉전처럼 오래 지속되기가 힘든데, 그 이유는 미국과 중국이 상당한 경제적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서로의 리스크 요인을 안고가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정리하자면,
i) 미국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중국과 협력관계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든든한 안보방패인 미국에만 의지하기가 힘들어졌다.
ii) 그러나 중국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미국은 중국을 협력하는 한편으로 견제도 해야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일본은 미국이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국견제의 대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강경하게 반대하지는 않는다.
iii) 그렇지만 일본이 재무장할 수 있는 시한은 미중의 패권경쟁이 안정화되기 전까지다. 미중의 패권경쟁이 안정화되고나면 더이상 일본은 재무장할 수 있는 빌미가 없어진다.
위 세가지 이유로 인하여 일본이 현재 급격히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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