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사태로 세간이 떠들썩한 지금 나 또한 어떤 글을 올리는 데에는 주의할 수밖에 없다. 비전공자가 아닌 정치학 전공자로서, 즉 아직 학문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편향된 시각을 갖고 어떤 문제에 접근하면 결국은 내 세계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국정원 사태가 큰 규모로 확산되었고, 결국 국정원의 국내파트 폐지라는 극단적인 논의로까지 이어졌다. 이 사안이 가지는 함의 자체가 상당히 민감한 부분인만큼 한번쯤 반드시 논의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라 생각한다.
정보는 권력: 정보기관과 권위주의(전체주의)
국정원은 해외정보, 국내정보, 북한정보의 세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 한국의 최대, 최고의 정보기관이다. 그 전신은 중앙정보부(약칭 중정부)이고, 전두환 시절에 국가안전기획부(약칭 안기부)로 명명되었다가 다시 99년에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었다. 여기서 화두로 떠오르는 파트는 바로 국내정보 파트이다. 국정원의 전신격인 중정부와 안기부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정권을 옹위하기 위한 기제로 작동하였고, 많은 진보세력을 소위 남산(중정부가 위치한)에 끌고가 고문하였다. 한국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일은 사라지게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국민들에게는 국정원의 국내파트는 중정부와 안기부 시절의 "남산"을 연상케한다.
한국뿐 아니라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 구 소련의 KGB, 북한의 보위사령부 등 역사적으로 권위주의~전체주의 정권에서는 정보기관이 정권의 오른팔이 되어 역할한 사례가 매우 많다. 이 정보기관들은 공개 혹은 비공개적으로 해외에서 첩보활동을 한 것은 물론, 국내의 여론조작 및 반대세력 탄압에 앞장섰다. 전두환 또한 12.12 쿠데타를 일으키며 즉시 했던 것이 바로 김재규의 체포로 공석이 된 중앙정보부장 자리의 획득이었다. 결국 전두환은 보안사령관(현 기무사령부의 전신)과 중앙정보부장 서리라는 대한민국 양대 정보기관의 수장을 꿰차게 되었고, 이는 이후 전두환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게 된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사례들의 결론은 정보를 장악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정보기관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권위주의~전체주의 국가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도 버젓이 정보기관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정보기관들 또한 해외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국내의 여론감시에 일부 참여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사상적 발원지인 영국에는 MI6가 해외정보를, MI5가 국내정보를 맡고 있으며, 이스라엘에는 모사드가, 일본은 내각정보조사실이, 미국은 CIA(중앙정보국), FBI(연방수사국), DIA(국방정보국) 등의 정보기관이 존재한다. 특히 영국은 전세계 민간인을 상대로 감청을 행하였고(YTN 13.06.22), 미국은 민간의 전화기록과 인터넷 사용내역까지 사찰(주간동아 892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적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국가적 특수성을 굳이 고려하지 않더라도 국가 정보기관에 의한 민간 모니터링은 이처럼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정보기관의 역할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점차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정보기관과 권위주의~전체주의 체제에서의 정보기관의 국내역할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① 정보기관의 목적 : 권위(전체)주의의 정보기관은 정권보호을 목표로 한다. 이들의 안보 스펙트럼은 어디까지나 권위주의 정권 자체의 생존에만 한정되어 있으며, 따라서 국내정치 범위 내라도 정권유지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라면 개입한다. 반면 민주주의의 정보기관은 국가안보를 목표로 한다. 이들의 안보 스펙트럼은 국가를 적국의 첩보 및 테러행위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고, 따라서 정권에 대하여 정치적인 중립성을 지닌다.
② 개입의 정도 : 권위(전체)주의의 정보기관은 사안에 대한 적극적 개입Intervention을 그 수단으로 삼는다. 여기서 적극적 개입이란 해당 사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를 뜻하며, 통상 이것은 반대파를 탄압 및 숙청하는 등의 물리적 폭력행위로써 이루어진다. 반면 민주주의의 정보기관은 사안에 대한 감시Monitoring를 그 골자로 하며, 사안에 따라 소극적 개입Benign intervention을 실시한다. 그러나 소극적 개입은 폭력을 수반하지 않으며, 사법권에 따라 처분된다.
③ 사법권의 유무 : 권위(전체)주의의 정보기관은 사안에 대한 처분을 정보기관 독자적으로 행한다. 즉, 정보기관이 사법기관을 초월하는 권한을 지닌다. 반면 민주주의의 정보기관은 사안을 수사하기는 하지만 처분은 사법기관 송치에 그친다. 즉, 정보기관은 수사권만 지니며 재판권은 여전히 사법기관이 지닌다.
정보기관: 필요악
위를 정리해보자면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정보기관은 정치중립적이어야하고, 민간에 대한 감시 내지 소극적 개입(불가피할 경우)을 지향하며, 사법권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민간에 대한 감시라는 점이 어쩌면 민주주의 사회에는 독소로 작용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여론의 형성을 심각한 수준으로 저해하지 않는다면 국가안보라는 측면에서 정보기관의 감시는 필요악이다. 실제로 지속적인 테러 위협에 시달려온 미국과 영국은 민간 통신선 감청으로 수많은 테러시도를 미연에 방지하였다. 민주주의는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도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 안전에는 물론 군대와 같은 물리적 무력이 대외적으로 큰 기여를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정보기관이 안보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북한은 지속적으로 대남 심리전을 감행 중이다. 이로 인해 수많은 진보 세력 중에서도 종북이적세력을 색출해야하고, 그 많은 종북이적세력 중에서도 한국의 안전을 위해하는 적대세력을 색출해야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느정도 감시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내적안보가 바로서지 않으면 그 국가는 바로 안에서부터 붕괴하게되는 것이다.
위 기준에 따르면 국정원은 민간에 대한 개입의 정도 측면에서나 사법권 유무 측면에서 틀림없는 민주주의적 정보기관에 해당한다. 그러나 국정원은 지금까지 심각하고 고질적인 문제점을 안고왔다. 비단 이번 보수정권뿐 아니라, 국정원은 진보 정권에서도 정권의 사조직 역할(시사저널 12.12.05)을 해왔으며, 노무현의 이명박 사찰 문제는 이미 이슈화된 바 있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진보정권도 그리 해왔으니 보수정권도 그리 하는것이 옳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국정원이 여전히 정권의 사조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정치에서 철저히 국가안보와 방첩임무에 충실히 해야할 국정원이 이러한 해프닝으로 대국민반감을 사게 된다면 향후 국정원이 정말 국가안보를 위해서 실시하는 민간 모니터링도 그 길이 막혀버리게된다. 국정원이 민간 감시만 한다면 그것은 안보를 위한 필요악으로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겠지만, 그 민간 감시가 특정한 정권을 위한 것이라면 결국 권위(전체)주의적 정보기관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정권이 교체되면 국정원이 물갈이되는 것이 어느샌가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다. 모름지기 정보기관이란 국가원수인 대통령도 감시범위에 포함시킬 정도로 중립적인 집단이어야 한다(아마 그랬다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경선을 적에게 양보하는 일 따위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국정원은 정치적 중립 의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며, 국정원의 감사원 수준의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 도구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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