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렴경쟁과 발산경쟁
사회의 갈등축을 둘러싼 정치세력(주로 정당들)의 경쟁 형태에는 중앙으로 수렴하는 경쟁체제와 양 극단으로 발산하는 경쟁체제가 있다.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한 국가의 좌우스펙트럼에 정당 4개가 있다고 가정한다. B 정당은 약한 좌파 성향을 가진 중도좌파 정당이고, C 정당은 약한 우파 성향을 가진 중도우파 정당이다. A는 급진 좌파 성향을, D는 급진 우파 성향을 지니는 정당이다.
좌파 중도 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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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 C D
양당제 국가 : 2개의 정당만이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받는 양당제 체제(미국 공화당-민주당, 영국 보수당-노동당)에서의 정당은 대개 B와 C 정당의 형태를 가진다. 양당제 하에서는 두개의 정당이 합법적인 정당이고, 실질적으로도 두개의 정당만이 의회에서 의석을 차지하고 대통령을 배출한다. 이에 따라서 양당제 하의 정당들은 비교적 넓은 스펙트럼의 정치성향을 포용할 수밖에 없다. 위 그림을 통해 설명하자면, 양당제 체제에서는 A정당과 D정당이 없이, B정당과 C정당만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B정당은 급진좌파부터 중도세력에 이르기까지의 스펙트럼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어야한다. C정당도 마찬가지로, 급진우파에서 중도세력에 이르기까지의 스펙트럼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어야한다. 정당체제가 양당제라는 것은, 해당 사회의 갈등의 축이 1개로 수렴한다는 것이다(대개 이는 노동-자본의 갈등). 따라서 유권자들의 대부분은 중도성향을 지니며, 정당간의 경쟁도 이 중도층을 포섭하기 위한 수렴경쟁 체제로 진행된다. 정리하자면 양당제는 집권에 욕심이 있고, 집권할 능력도 있는 두 세력간의 수렴경쟁체제(중도파 포섭)다.
(여기서 집권이란 의회에서 다수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온건한 다당제 국가 : 온건한 다당제 국가에서는 경쟁할 수 있는 정당이 3개 내지 5개까지 존재한다. 유권자들의 분포는 좌우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으며, 중도층은 엷다. 이러한 유권자 분포 때문에 온건한 다당제에서는 거대한 좌파 및 우파정당이 형성되고, 대개 이 두 정당은 균형을 이룬다. 위의 그림에서 따지자면 B정당과 C정당인 셈이다. 선거에서 집권하는 정당 또한 대개 이변이 없는 한 B정당과 C정당 둘 중 하나이다. 이 거대 좌/우파 정당을 축으로 좀더 급진적인 좌파정당인 A와, 좀더 급진적인 우파정당인 D가 나타날 수 있다. 만약 중도좌파 B정당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C와 D가 연합하여 중도우파를 결집하고, 중도우파인 C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A와 B가 연합하여 중도좌파를 결집할 가능성이 크다. 온건한 다당제 체제 하의 정당들은 아직까지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고, 따라서 경쟁은 거대 중도좌파와 거대 중도우파 결집을 위한 수렴경쟁 체제로 진행된다. 정리하자면, 온건한 다당제는 집권할 욕심과 능력이 모두 있는 정당이 두개 이상이고(그러나 대개 두개), 플러스 알파로 소수정당이 몇 존재하는 수렴경쟁체제(거대 중도좌파, 거대 중도우파 결집)다.
극단적인 다당제 국가 : 극단적인 다당제 국가는 흔히 정국이 매우 혼란한 국가가 많다. 대표적으로 공산당이 유지될 뿐 아니라 상당히 많은 국민지지를 얻었던 이탈리아의 경우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 극단적 다당제가 유지되었다. 극단적 다당제 하에서 유권자 분포는 좌파, 중도, 우파에 고르게 분포한다. 온건적 다당제와 차이점을 이야기하자면,
ⓐ 극단적 다당제 하에서는 중도좌파인 B정당과 중도우파인 C정당만 집권을 위해 경쟁하고, 급진좌파인 A정당과 급진우파인 D정당은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한다. 모 후보 왈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러 나왔습니다.
ⓑ 온건한 다당제 하에서 중도좌파인 B정당과 중도우파인 C정당의 세력이 거대했지만, 극단적 다당제 하에서는 A, B, C, D 정당의 세력이 모두 비등비등하다. 즉, 급진적 정치세력의 영향력이 상당히 높은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 다당제 국가에서 정치경쟁은 좌파와 우파가 명확히 분열하면서 발산경쟁 체제로 진행된다. 정리하자면, 극단적 다당제에서는 매번 집권하는 정당은 한정되어 있고(중도정당), 다른 정당들은 극단적인 성향을 갖는 발산경쟁체제(거대 좌파, 거대 우파 결집)이다.
사실상 양당제와, 온건다당제, 극단다당제의 차이는 명확하지는 않다. 양당제에서도 미국의 녹색당 등 제3의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온건다당제에서도 당은 많이 존재하고 저마다 영향력도 나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두 정당만 다 해먹는 집권하는 양당제에 가까운 체제가 있다(특히 한국). 온건다당제와 극단다당제의 구분 또한 사실 굉장히 모호한데, 그 관건은 정당들이 중도층을 포섭하여 중도좌파 혹은 중도우파 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중도를 향해 움직이는지, 아니면 저마다의 좌파, 우파 세력을 결집하여 양 극단을 향해 움직이는지의 차이다.
유권자의 분포는 대개 정당의 분포와 같은 맥락을 지닌다. 정당이 먹고살기 위해 두터운 유권자 분포를 지닌 스펙트럼에 위치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유권자의 분포라는 것은 결국 해당 사회의 갈등의 축이 몇개인가에 따른것이다.
i) 양당제에서는 유권자가 중도에 두텁게 포진하고 있다. 양당제 체제하에서의 사회갈등은 끽해봐야 약한 노동-자본 갈등이 대부분(이마저도 크지 않다)이고 다른 치명적인 사회갈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ii) 온건적 다당제 하에서는 유권자가 좌우에 두텁게 포진하고 있는데, 이는 노동-자본 갈등이 상대적으로 심화된 사회에서 많이 나타난다. 보통 신자유주의(야경국가) 대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간의 갈등이나 복지의 정도(최소한의 선별적 복지부터 보편적 복지까지)를 두고 시끄러운 국가이다. 그러나 이는 정책의 변화로서 충분히 조정될 수 있는 사안들이므로 치명적인 갈등이라고 볼 수는 없다.
iii) 극단적 다당제 하에서는 유권자가 좌, 우, 중도에 고르게 분포한다. 흔히 노동-자본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거나, 민족/종교 갈등이 극에 달한 사회에서 많이 나타난다. 중도에 분포한 유권자들은 어느정도 정책변화로 조정될 수 있는 사안에서 경쟁하는 세력들이고, 좌우 양 극단에 분포한 유권자들은 사회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체제의 전복 그자체를 노리는 경우가 많다(가령 공산당의 사회주의 혁명, 우파의 파시즘 정책). 내 문제는 정책의 변화 따위론 해결할 수 없지.
발산경쟁체제와 타협정치Negotiation Politics
대개 중도가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한 사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마냥 좌파적일 수가 없고, 또한 마냥 우파적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경쟁의 방향이 중도를 향할수록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쟁이 중도를 향해 이루어지는 수렴경쟁체제에서는 어떻게든 정치세력들이 중도층을 포섭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중도층에서 만나게 된다. 이에 따라 경쟁하는 정치세력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인지하게되고, 이 공통점을 매개로 하여 순조로운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반면 경쟁의 방향이 발산적이라는 것은, 유력하고 거대한 정치세력이 저마다의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발산경쟁체제에서는 정치세력들이 중도층을 포섭하기 위한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각자 좌파진영과 우파진영을 공고히하는데 열을 올린다. 발산경쟁체제에서의 정당들은 자신의 색채를 좀더 뚜렷하게 하기 위해 극단적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들이 중도층에서 만나게되어 공통점을 인지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기껏해야 의회에서 정쟁을 벌이며, 일부 사안에 있어서 타협정치Negotiation Politics를 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험 앨리슨Graham Allison의 비합리적행위자모델인 조직과정모델(국가의 정책결정은 대규모 조직들의 역학관계와 성향에 의해 이루어짐)과 관료정치모델(국가의 정책결정은 대규모 조직들 간의 협상과 타협을 통해 이루어짐)의 포커스는 정부 내 각 부처이다. 그러나 이를 응용해본다면 정당간 경쟁체제에도 응용해볼 수 있다. 발산경쟁체제에서의 정치세력들은 공통적인 이해관계를 찾지않고 상호 양 극단을 향하는 성향을 띄기 마련이고, 이로 인해 정책결정은 진지한 논의나 토론을 거쳐서가 아니라, 정치적 타협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쉽게말하면, 어차피 대화해도 공통점을 찾을수 없으니 협상이나 하자는 것이다. 가령 박근혜 새정부가 집권한 이후에 새정부가 내놓은 정부부처개편안에 대한 민주당의 회답은 개편안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닌 뜬금없는 쌍용차 국정조사였다. 여당이 추구하는 정책이라면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고, 자신들에게 정치적 이득이 되는 사안과 "빅 딜Big Deal"을 맺어보려는 치졸한 진보 세력의 행태가 그대로 드러나는 상황이다.
타협정치는 현실정치에서는 어느정도 불가피한 현상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여권도 자신들이 원하는 바대로 법안을 거의 수정없이 통과시킬 수 있고, 야권도 법안을 통과시켜주는 대신 일정정도의 보상을 가져가니 어찌보면 윈윈게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타결된 법안은 지속성과 국민지지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여권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내고 불리한 조항은 최대한 빼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야권이 제대로 된 딴지를 걸고, 깊은 논의를 해보면서 국민 대다수의 공감을 살 수 있는 법안으로 갈고 다듬어 입법해야한다. 발산경쟁체제 및 타협정치체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해진다.
한국은 양당제 성향을 가진 온건적 다당제 국가이고, 대다수의 정당들은 수렴경쟁을 해왔다. 그러나 야권의 "발목붙잡기 행위"가 고착화되고 당연시되면서 좌우의 경쟁은 점점 중도를 향한 수렴경쟁이 아닌 양극을 향한 발산경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통합진보당과 NL종북세력의 등장(즉, 체제전복적 세력의 등장) 또한 경쟁체제가 발산화됨에 따라 온건했던 다당제가 극단적인 다당제로 변질되고 있음을 방증하는 바이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함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다름"들은 상호 공통점과 공통이익을 찾아 협력하는 관계로 공존해야한다. 서로의 이익만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행태는 국론분열을 조장할 뿐 아니라, 나아가 국정이 정치인들의 심사숙고와 토론에 의해서가 아닌,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협상을 통해 운영되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또한 정당은 국내 정치세력들을 대표하는 기구인 동시에, 그 정치세력들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함께 맡는다. 즉 정치의 엘리트들인 것이다. 각 정치세력의 엘리트들이 극단적인 경쟁의 형태를 띄게 되면 그들을 지지하는 지지세력들 간의 경쟁도 극단적인 형태를 띄기 마련이다. 인터넷 상 과격한 보수집단과 과격한 진보집단의 등장이 바로 그 이유다. 정치세력 간 선의경쟁과 수렴적/생산적 경쟁의 모범이 되어야할 정당이 소모적이고 발산적인 경쟁을 일삼는다면 사회의 갈등 또한 그만큼 소모적이고 발산적으로 흘러가게 된다.
여권이 피아노에서 "도"를 치고자하고, 야권이 "레"를 치고자한다면 둘은 "도#"을 치기로 합의함으로써 다수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추진해야한다. 그러나 여권이 "도"를 치고자하는 반면, 야권은 아 쟤내가 "도"를 치니까 우리는 "솔"을 치자는 식으로 각자 피아노 건반을 눌러버리니 정치권에도 불협화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도"와 "솔" 사이의 "미" 정도를 친다면 다행이다. "미"를 칠 생각은 안하고 서로 자기가 치고자하는 건반만 치니 그것이 발산적이고 소모적인 경쟁의 전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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