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게임을 즐겨하던 시절,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현대의 무기인 기관총 따위를 고대와 중세의 전장에 들고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게임이 있었다. 칼이나 머스킷 총을 쓰는 적군에게 시원하게(?) 기관총 연사를 할때의 심리적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시간과 역사 속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상상을 한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짧게는 현대의 증권정보를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 막대한 부를 얻겠다는 생각이 가장 많을 것이고, 좀더 상상력의 스케일이 거대한 사람은 현대의 과학기술을 습득하고 과거로 돌아가 한 나라의 왕이 되어보겠다는 상상도 해보았을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해서 이러한 생각들이 무작정 공상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어리석다. 현대의 문물이 과연 과거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의 의문은 거꾸로 문물이 발전된 미래에는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진보 혹은 퇴보할 것인지를 엿보게 하는 의미있는 사고실험이다. 다만 물질문물과 사상은 조금 다른 속성을 가진다. 가령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나 십자군 전쟁에 기관총을 들고 간다면 그 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화력과 살상력을 가졌을 것이고, 현대의 물리화학 지식을 가지고 중세로 돌아간다면 자동차는 진즉에 등장할 수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물질문물(문명 혹은 과학)은 이처럼 미래의 것이 과거의 것보다 우월하지만, 과연 민주주의의 이념을 절대왕정시대로 가지고 가거나, 민족주의의 이념을 신석기시대로 가지고 간다면 어떨까? 현대의 이념이 과거에 적용될 수 있을지의 의문은, 역으로 과거의 이념이 현대사회에 적용될 수 있을지의 의문과 직결된다. 이 의문은 시점을 옮겨 현대의 이념이 미래에도 지속될 수 있을지의 의문으로 이어진다.

 

사상의 속성

물론 과학이라는 학문도 엄밀하게는 철학의 분과이기 때문에 사상과 과학을 완전히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정치사상"과 과학의 차이점에 주목하기로 한다. 사상과 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과학은 분명히 "발전"하지만 사상은 발전이라는 말보다는 "변화"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다. 과학은 어떤 한 과학자가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에 정수리를 한대 후려맞고 탄생시킨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뜨거운 주전자에 손을 얹은 3분은 어여쁜 소녀와 데이트하는 30분보다도 길다는 상상에서 착안한 상대성이론에 의해, 또 왠지모르게 원숭이가 인간과 너무 닮은 것 같다는 의문에서 출발한 진화론에 의해 진일보한다. 이렇게 새로이 발견된 사실들은 이전에는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했거나, 상상은 했어도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여 소수학설로 남아있던 것들로서, 일단 필요충분한 근거가 확보되고나면 이러한 학설들은 이전의 학설들을 모두 "헛소리"로 매장시켜 버릴만한 위력을 자랑한다. 이러한 발전의 단계는 언제 그 단계를 밟는가와는 그다지 큰 상관이 없다. 가령 이전에 충분한 발전의 단계를 밟아왔다면 중세시대에 (기독교 신정의 폭압을 논외로 한다면) 상대성이론이 이미 밝혀졌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역사상 천재적인 과학자가 영 부족했다면 이 글은 인터넷 블로그에 키보드로가 아닌 양피지에 깃털펜으로 쓰이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이처럼 과학은 시대상과는 비교적 독립적이며(대체로 독립적인 과학과 시대상을 굳이 연관시킨 것이 과학철학), 새로운 과학이론은 이전의 과학이론을 모두 대체할 수 있을만큼 파괴적이다.

 

 

이 블로그에서 내가 쓴 글을 두 개 정도 이상 읽어본 독자라면, 내가 사상을 다루는 글에서 뜬금없이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면 그것은 과학과 사상은 반대의 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의도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상은 시대상과 독립적이지 않고, 또한 새로운 사상이 이전의 사상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파괴적이지도 않다. 가령 민주주의가 명목상으로나마 실현된 것은 20세기 이후이지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논의는 이미 플라톤 시절부터 이루어졌으며, 플라톤 시절에는 단순히 민주주의 체제가 "그 시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개념도 마치 어느날 갑자기 마르크스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한순간에 뚝딱 만들어낸 사상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유재산제도가 철폐된 완전한 공산주의 국가를 묘사한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머스 모어는 마르크스보다 340년이나 먼저 태어난 사람이고,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적인 역사관이 된 변증법적 유물론은 반세기 전 헤겔에 의해 그 아이디어가 시작된 것이다. 즉, 사상의 역사에서는 과학의 역사처럼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론이 하루아침에 혜성처럼 등장하여 학계의 판도를 바꾸어놓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상의 변화는, 이전에도 이미 논의된 바 있지만 그때 당시로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비주류 사상이 어찌저찌 지금의 시대상의 해결방안으로써 대중의 공감을 얻어 주류 사상으로 등극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시대상에 따라 주류 사상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과학도들은 현대의 신(新)학설들이 파괴해버린 2000년 전의 과학이론을 공부하지 않지만, 사회과학도들은 여전히 2000년 전의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의 시대상이 2000년 전과 유사한 병폐를 갖게 된다면 2000년 전의 케케묵은 사상이 번쩍번쩍 광나는 주류 사상으로 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세상이 갖는 문제의 유형은 생각보다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크게 정치사회적 평등과 자유에 대한 논의가 그 문제의 대표격이고, 현대로 치면 빈부격차가 작은 대신 사회가 저발전적이라면 신자유주의가, 사회가 고발전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하다면 사회민주주의가 득세하는 식이어왔다. 이 때 신자유주의가 득세한다고해서 사민주의의 가치가 완전히 폐기되지 않고, 반대로 사민주의가 득세한다고해서 신자유주의의 가치가 완전히 폐기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불과 10년전 만물의 해결책인 것처럼 들어왔던 공기업 민영화가 10년이 지난 지금 만물의 악으로 전락한 것을 똑똑히 보고 있다.

 

사상의 적시성과 보편성

 

 

 

다시 서론에서 제기한 의문으로 돌아와보자.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하여, 어떤 용감한 민주주의 사상가가 타임머신을 타고 테르모필레 전투 때로 돌아가 레오디나스 왕에게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의 폐해를 설파한다면, 크세르크세스의 사신같이 "This is Sparta!"라는 사자후를 들으며 밑도 끝도 안보이는 구덩이에 파묻히는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물론 영화 <300>에서는 그런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This is Sparta"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필요충분하게 담고 있는 문장이다.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으로부터 스파르타라는 도시국가가 지도상에서 지워지느냐 마느냐의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그것은 스파르타가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해 무지해서가 아니라, 스파르타가 처한 시대상에 비해 민주주의는 그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사상으로서 적시성이 없다는 것이다. "페르시아에게 국가의 존망을 위협받는 그리스 도시국가 중의 하나인 스파르타"이기 때문에, 즉 "This is Sparta"라는 이유로 그 당시 그 상황에서 스파르타가 채택한 전체주의적 군국주의 이외에 다른 사상은 스파르타에 적용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시대에 어느 국가에서 주류 사상으로 등극한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그 국가이기 때문에 적시성을 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에 민주주의가 주류 사상으로 등극한 것은 그것이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관들을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권력분립과 선거라는 민주주의적인 제도장치가 마련되지 못하였으며, 당장 국가간 심각한 갈등과 전쟁으로 오늘 지도에 있던 국가가 내일 지도에서는 없어지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면 민주주의는 결코 주류 사상으로 등극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탄생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탄생하지도 못했음이 틀림없다(자본주의의 발전과 민주주의와의 관계는 http://aceferr.tistory.com/75 참조). 배부르고 등따시니 민주주의 이야기한다는 말은 듣기는 거북할지언정 영 틀린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상은 발전하지 않고 "변화"하며 적시성을 갖는다는 것이 역사발전에 있어 어떠한 지상가치도 없고, 과거 파시즘의 악행 또한 적시성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것인가? 동시에 거시적인 사회가 목적성없이 현실에 대한 적시성만을 가지며 변화해간다면 개별 인간의 삶의 목적 또한 없는 것인가? 역사는 미시적으로는 적시적인 변증법을 따를지 몰라도, 거시적으로는 보편적인 변증법을 따르고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변증법의 목적은 마르크스가 주창한 것 같은 공산주의 사회 건설은 아니다.) 이 말은, 분명 역사는 2보 전진과 1보 후퇴를 반복해왔지만, 그 초점은 국가의 존망에서 민족의 자주, 민족의 자주에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로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은 결과적으로 상부구조에 집중된 권한을 하부구조로 분산시키는 방향, 즉 개별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의 흐름의 동력은 대다수의 인류가 그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김에서 비롯된다. 과거 파시즘은 이러한 "공감받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했다는 데에서 그 비판점을 찾을 수 있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역사는 단기적으로는 요동치는 Sin x 함수의 그래프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변동폭이 줄어들며 일련의 수렴점으로 향해가는 그래프를 그릴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현대의 민주주의가 단순히 다수의 소수에 대한 정치적인 승리에서, 미래에는 개별 인간의 개별적인 가치를 빠짐없이 공동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조금더 포용적이고 보편적인 체제로 변화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는 또한 2보 전진과 1보 후퇴의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질문으로 돌아와 과거의 사상이 현대사회에 적용될 수 없고, 현대의 사상이 과거에 적용될 수 없듯, 보편적인 방향점이 있다고해서 어떠한 사상이든 시간과 떠나있을 수는 없다. 사상은 분명 일련의 특이점(여기서는 개별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향해가고 있지만, 어떠한 한 사상이 형이상적인 관점에서 "이데아"라고 칭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어떤 한 사상이 인류 보편적으로 도덕적인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장기적인(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잣대요, 어떤 한 사상이 현재 이 사회에 적절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단기적인(적시성의) 관점에서의 잣대이다. 보편적으로 옳은 사상이라도 당장 적시성이 없을 수도 있고, 보편적으로는 옳지 않지만 적시성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 사상도 있다. 민중은 보편적인 사상을 지지하려고 하며, 지도층은 (겉으로는 보편적인 사상을 지지하는 척 하지만) 적시적인 사상을 민중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당장의 가치판단은 매우 어려우며, 따라서 민중과 지도층은 그들이 추구하는 사상에 대한 끊임없는 타협과 논의, 더 나아가 투쟁과 억압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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