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상 여성혐오의 역사는 꽤나 오래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는 지하철 개똥녀인데 그게 벌써 10여년 전 이야기다. 그때까지만도 무개념 개인의 일탈행위로만 여겨졌던 것이, 루저녀 파문과 남녀 병역문제, 부조리한 결혼문제 등과 더불어 이제와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로 번지게 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여성혐오의 세가 강해지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성혐오 풍조도 창궐하여 인터넷에서는 그야말로 총성없는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말 합정거리에는 연인 손 안잡은 놈이 없건만, 익명이라는 가면 하에서 이성에 대해 저렇게도 날선 비난을 쏟아대는 이들이 정말로 히키코모리고 모태쏠로들 뿐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성적인 여러 문제들이 한쪽 성의 책임감 부재로 치부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일까?

한국의 남녀평등 이슈에 대해 거론하기 이전에, 나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남성상위의 사회는 구태여 한반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전세계적으로 현시되었던 보편적인 현상이다. 농경사회든 유목사회든, 사회에 직접적으로 생산력을 제공하는 것은 대체로 남성이어왔고, 여성의 역할은 지극히 축소된 채로 근대까지 이어져왔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국가들은 일찍이 그러한 성차별 문제를 극복하였고, 어째서 한국같은 국가들은 여태까지도 남녀간의 전쟁을 피하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아래 네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1. 늦은 산업화
산업화가 남녀평등에 기여하는 바는 어마어마하다. 첫째로 각종 기계설비와 컴퓨터는 여성의 노동생산성이 남성과 비교적 동등해지는 데에 기여하였고, 둘째로 노동생산성이 향상된 산업화 사회에서는 농경사회와는 달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의 문제로 평생을 집안에서만 보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야말로 산업화는 여성을 가정이라는 감옥에서 구출한 일등공신이다.

이러면 선진국들이 비교적 남녀평등을 쉽게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설명된다. 근대 이후 선진공업국들은 여성을 더이상 인구재생산의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게 되었으며, 이렇게 경제권력을 얻기 시작한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하기까지에도 비교적 짧은 시간이 소모될 뿐이었다. 더욱이 IT 및 반도체 산업과 같이 산업수준이 높아질수록 남녀의 노동생산성은 눈에 띄게 평준화되었고, 오히려 여성의 생산성이 남성을 능가할 수 있는 서비스업의 발달로 (저출산으로 신음하기는 하지만) 여성이 가사노동에 매달리는 경우는 더욱 줄어들었다.

한국의 경우 거꾸로 생각하면 된다. 주된 논점은, 한국이 이제와 선진공업국들과 산업의 양적인 측면에서나 질적인 측면에서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와중에도 어째서 남녀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는가 인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 시간의 문제다. 짧게 잡아도 2세기 간 안정적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진 선진공업국들과는 달리, 한국의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진 지는 채 수십년이 지나지 않았다. 여성의 노동기회는 폭증하였지만, 이에 대한 임금 등의 사회적 보상은 점진적으로 증가할 뿐이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이 보상을 (농경세대 시절과 같이) 남성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는 남성들이 사회 혹은 가정에서 자신들의 경제권력이 잠식당함과 동시에 가부장적인 권위도 상실하고 있지만, 여성들은 아직도 남성의 주도적 역할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현대 한국의 주요한 남녀갈등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2. 대규모 총력전의 부재
서글픈 소리지만 한바탕의 전쟁이 사회변화를 유도한다는 것은 부정키 힘든 사실이다. 남녀평등 문제에 전쟁이라니 뭔가 뜬금없는 소리같지만, 여권신장은 통상 여성 노동력의 증가에서 파생되고, 대규모 여성 노동력 증대 현상은 전쟁이 아니고서는 거의 발생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분명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한국도 6.25 전쟁이 있었지 않은가 하고 반론할지는 모르겠으나, 6.25 전쟁은 선진공업국들이 수행했던 많은 전쟁과는 궤를 달리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총력전이란 국가의 모든 자원과 노동력을 생산력으로 총동원하여 수행하는 전쟁, 그래서 생산과 전투가 동시에 행해지는 전쟁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2차 대전 후 미국과 소련이다. 총력전이 발생할 경우, 남성은 우선징집대상이 되기 때문에 국가 생산력의 상당 부분을 여성 노동력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노동력 성비전환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은 두가지인데, 첫째는 전쟁 수행국의 생산기반이 필요충분히 닦여있어야 하고(미국), 둘째는 부족한 생산설비나마 위치한 후방의 안전이 충분히 보장되어 투입된 노동력이 전후에도 보존될 수 있어야 한다(소련).

산업기반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여성 노동력을 징발한다고해서, 징발한 노동력을 투입할 수 있는 생산라인도 저절로 땅에서 솟아나지는 않는다. 전시에는 없던 설비를 증설하는 것도 힘들다. 따라서 징발 노동력은 무위가 되고 마는 것이다. 또한 주요 생산기반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수많은 노동력이 포화 속에 죽어나간다면, 기껏 전쟁 중에 키워놓은 노동력을 전후에 쓸 수가 없게 된다. 위 두 조건을 충족시킨 국가만이 폭발적으로 불어난 여성 노동력을 전쟁 중에나 전후에나 생산력에 보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총력전을 겪은 국가의 경우, 전후에 여성들이 숙련공이 되어 사회재건 및 발전에 귀중한 자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의 발언권이 증진될 기회가 충분했다.

한국전쟁의 경우, 제시한 조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다. 마땅한 산업기반이 없어 전쟁수행 자체를 미군과 UN군의 물자지원에 의존하였고, 설령 산업기반이 있었다해도 이미 낙동강까지 전선이 후퇴하여 후방 생산라인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많은 여성 노동력을 투입할만한 가용 설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여성 숙련공의 양산은 60년대 경공업 육성 때에나 되어서야 이루어진다. 그러나 남성 노동력을 그야말로 "대체"할 수밖에 없는 전시와는 달리, 평시에는 여성 노동력이 그만한 중요성을 가지기 힘들다. 그만큼 여성 발언권의 증진이 늦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3. 벗어나지 못한 농경문화
수도권에 천만명의 인구가 집중된 한국인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른다. 도시화는 외형적인 도시 인구집중 이외에도, 넓게보면 사회적 문화 자체가 농경사회의 대가족 문화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시댁에서는 농경 시절 남의 집 딸을 결혼제도를 통해 일시불로 땡겨와 평생 부려먹는 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외형적인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무상 노동력(?)을 농경에 쓸 필요가 없게 되자 명절이나 제사 등의 허례허식에 유용하는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였다.

더욱이 절대적인 노동력이 가문의 부침을 결정하는 농경문화의 특성상, 결혼이라는 것이 당사자 간의 사건이 아닌 가문 전체의 사건으로 여겨지는 문화도 현재의 부조리한 결혼문화에 한 몫 하고 있다. 산업구조 자체가 더이상 남성을 선호하거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가문의 대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남아선호와 다산선호를 버리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졸지에 한국 여성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출산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고, 이는 장차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혹자는 한국의 출산률이 세계 최저 수준을 찍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말이 설득력이 없다고 할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교육을 간과한 소리다. 한국만큼이나 교육열이 강한 사회에서, 자식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척도는 여성의 능력과도 직결된다. 자연히 한국의 육아에는 중등교육과정까지의 교육과 훈육 또한 포함되며, 이는 한명을 낳더라도 육아과정이 대폭 길어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한 교육을 모두 공공부문에서 커버할 수 있느냐하면, 그런 것도 아니므로 여성의 사회진출은 더욱 늦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어찌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일 수 있다. 남성 쪽에서 여성의 무상 노동력과 후손 생산을 요구하기 때문에 여성 쪽에서도 남성의 충분한 재력을 요구하는 건지, 여성이 남성에게 충분한 재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남성도 반대급부를 원하는 건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인터넷 상 남녀는 각자에게 유리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 듯 하다.

​4. 잘못된 여성지원 정책
이 부분에서 논의할 것은 남성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아니다. 바로 여성정책 자체의 포커스가 잘못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통계청 조사결과 07년 2분기 기준 20대 남성 고용률은 60.7%, 20대 여성 고용률은 59.7%로, 청춘 남녀의 고용률 측면에서는 어느정도 평등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점은 여성의 고용안정성 또한 남성과 같느냐는 것이다.

3 항목에서 논의한대로 한국 여성들은 여지껏 출산과 육아의 부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기업들도 그러한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다. 어차피 결혼적령기가 되고 애낳으면 나가버릴 인력을 뽑느니, 차라리 같은 연령대의 남성을 뽑는 것이 기업에게는 이익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남성의 능력이 여성의 능력보다 월등하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정량적인 데이터가 아니면 극히 성차별적인 발언에 불과함을 인지하자.

따라서 20대 여성들은 남성과 평등한 위치에서 취업이 가능하다해도, 40대~50대 이후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참으로 애매한 것이, 이 즈음이면 재취업도 힘들 뿐더러, 육아도 대충 마무리 되는 시기다. 남성들은 그 또래 여성들이 카페에서 자리나 차지하고 논다고 이야기하는데, 막상 생각해보면 일과 육아 모두에서 배제된 여성들이 할만한 게 그것 이외에 무엇이 있겠나. 따라서 여성정책이 주안점을 두어야할 것은 이미 소기의 성과를 거둔 20대 여성이 아니라, 이렇게 낭비되고 있는 중장년층 여성 노동력인 것이다.

​종합
이 글을 쓰면서 누군가는 내가 현대 여성의 문제를 합리화하고 있다고 비판할런지 모른다. 나 또한 현대 한국여성들의 사고방식이 도의적이고 합당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이라는 것 또한 사회제도와 문화에 대한 개인의 반응양식일 뿐이고, 사회변화 없이 여성들이 "양심적으로" 자신들이 받고 있는 과한 배려를 포기하기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녀평등 문제는 서로를 비난만 해서는 해결될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며, 종합적이고 정교하게 접근해야할 정책적인 이슈라는 것이다.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이 글에서 시종일관 여성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극단적인 페미니즘이 아닌 이상 남녀평등 가치의 목표 자체가 여성상위로의 이행이라기보다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녀평등 이슈에서, 이미 남성위주로 꾸려진 사회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외생적인 환경이고, 이 사회와 자원을 이제금 어떻게 남녀가 공정하게 나누어 갖느냐가 핵심이다. 그렇기에 약자가 왜 약자가 되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전논의가 필수적인 것이다.

여성혐오의 근간에는 항상 "동등한 지위에는 동등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따른다. 그러나 전후사정 생각도 하지 않고, 이제 평등해졌으니 무작정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요구가 아니다. 지금의 외형적인 남녀평등은 지극히 일시적인 정책적 결과일지도 모르며, 이렇게 남녀갈등이 심화된다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다.

위와 같은 원인분석 따위 없이 남성 입장에서 강제로 남성 역차별을 격멸하고 결혼비용을 낮추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 조직적으로 결혼을 보이콧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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