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여자친구가 내 팔뚝을 만져보더니 의외라는 듯 귀엽게 웃었다. 5년차 커플이지만 이제서야 새삼 새롭게 여겨질 정도로 내 근육은 지방에 의해 과잉보호되고 있다. 사실 근육이라기보단 살덩이가 뭉친 셀룰라이트에 가까운 것이지만 으쓱해진 흥을 구태여 깨지는 않았다. 근육이든 지방이든, 28년 살아오며 스키니진 못 입을 때 빼고는 굵은 팔뚝과 장딴지를 부끄러이 여겨본 적이 없었다. 내 팔뚝과 장딴지는 꼭 친탁이다. 다른 곳 쏙 빼두고 팔뚝과 장딴지만 놓고 봐도 나는 부정할 길 없는 울 아버지의 아들이다. 조창인 작가의 <가시고기>엔, 아이를 세상에 남겨놓은 이상 사람은 죽어도 아주 죽는게 아니라더라. 엄마가 내 팔뚝과 장딴지를 보며 살 좀 빼라 타박할 때, 아버지는 남자가 저 정도는 되어야 힘쓴다며 허허거리던 것은 바로 내게서 당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명체는 본능적으로 혈연에 집착한다. 생과 사에 관한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공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는 존재론적 절멸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빈곤국 여성까지 구해 매매혼에 가까운 결혼식을 올리고, 누군가는 결혼정보업체에 거금을 쥐어주며 마음에도 없는 선자리를 찾아나선다. 또한 그래서 누군가는 가시고기처럼 자식을 위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차가운 세상과 투쟁하고, 누군가는 빚더미 속에서도 끝까지 생의지를 부여잡는다. 그 어떤 신이 영원한 구원을 약속하더라도, 또 그 어떤 세상의 발전이 자식타령을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더라도, 자신을 꼭 닮은 어린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세상에 들릴 때만큼은 기쁨을 숨길 수 있는 자가 드물다. 그것은 인류가 그토록 바라온, 그렇지만 그 어떤 종교나 과학발전도 보여주지 못한 "영생의 꿈"이 현시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뭇 남성들의 공상을 자극할만큼 막강한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식이니 가정이니 하는 삶과는 백만광년쯤 떨어져있다. 악당이 쳐들어오면 시뻘건 철갑옷을 입고 날아가는 갑부 출신, 퍼렇게 몸이 부풀어올라 빌딩숲을 타잔처럼 타고 다니는 박사 출신은 있어도, 평온한 가정에서 아이와 놀아주다가 출동하는 학부모 출신 슈퍼히어로는 지금껏 존재한 적이 없다. 정작 슈퍼히어로 스스로는 지독한 고독과 죄책감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우리는 지금껏 슈퍼히어로들의 "삶"에 대해 궁금해본 적이 없었다. 악을 분쇄하는 그들의 근육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을망정, 그들의 영혼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임을, 주먹을 쥘때면 튀어나오는 아다만티움 칼날은 외려 그들의 삶을 피와 살육으로 얼룩지게 하는 저주임을, 우리는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했다.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이 선악을 심판하고 징벌한다는 것은 무거운 책무다. 우리의 영웅은 기관총 세례 때문이 아니라, 한명의 인간이 감당키 힘든 책무와 고독으로 인해 죽어간다.

영웅 울버린에서 인간 로건으로

영화 <로건>은 오마주 덩어리다. 로건의 삶에 대한 성찰에 관해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용서받지 못한 자>를, 로건 부녀의 연출적 측면에서는 <레옹>을 오마주했다. 전체적인 느낌 상 <맨온파이어>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 작품 모두 피도 눈물도 없던 인간병기가 한 명의 인간으로 성장하는 스토리를 담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로건>의 주제의식을 얼핏 추론해볼 수 있다. 히어로물 코믹스 장르가 <다크나이트>에 이르러 히로이즘 자체에 대해 고찰(http://aceferr.tistory.com/205 참조)하더니, 이제는 캐릭터 해석 자체에 이만큼의 깊이를 더했다는 것은, 코믹스의 역사와 함께 성장하는 독자들에게 무척이나 반가운 이야기다.

"우리는 신의 계획이 아니라 신의 실수일지 몰라요."

로건의 한 마디는 영화의 배경을 관통한다. <로건>에서는 울버린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나이들고 다리를 저는 늦중년(그정도면 꽃중년이긴 하다만)의 아다만티움 인간이 등장할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하는 자신의 불멸이 저주스러워, 항상 자살할 총알을 재킷 주머니 속에 지니고 다니는 늙은 리무진 기사만이 등장한다. 든든한 초능력자 전우나 영리한 과학자도 없다. 정의에 대한 열망도, 불의에 대한 분노도 없다. 본디 인간은 수명의 유한성으로 인해 나이마다 응당 거쳐야할 관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그런 관문들을 거쳐가며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며 스스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내 기꺼이 죽음을 수용한다. 그러나 죽음을 모르는 살육병기로 근 2백년을 살아온 그에게는 매일 밤 엄습하는 악몽만이 있을 뿐이다. 악몽에서조차 로건은 그저 살인만을 반복하는 살육병기다.

그런 로건 앞에 난데없이 등장한 로라는 로건을 쏙 빼닮았다. 주먹을 쥐면 아다만티움 칼날이 나오고, 총상도 눈 깜짝할 사이 회복해낸다. 내 장딴지를 보고 울 아버지를 떠올리듯, 로건이 로라의 아버지임은 한치 틀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로건은 로라가 반갑지 않다. 로건에게 있어서는 로라 또한 일종의 책무, 평생토록 그를 괴롭히고 억압해온 정의수호라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의무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로라와 엮이지 않으려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영화 초반부 로건은, 세계평화를 위해 투신하던 왕년의 모습을 이미 잃어버린지 오래다. 갑작스레 안겨온 딸보다는 이미 익숙해져버린 고독의 그늘 아래로 숨어드는 편이, 로건은 외려 편안하다.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2백만 달러를 대가로 로라를 에덴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오르긴 하지만 굳은 표정이 펴질 길은 없어보인다.

유혈이 낭자한 19금 액션영화에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로건>은 일종의 성장드라마다. 생애가 분노와 외로움만으로 점철된 로건은 러닝타임을 가로지르며 진정한 가장으로 거듭난다. 로라를 추격하는 용병집단을 하나둘 쓰러뜨리는 로건에게서, 우리는 세계평화를 수호하는 슈퍼히어로가 아닌 처절한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로건의 말대로 그가 지키려했던 사람은 지금껏 살아남지 못했다. 이갈리는 악당들, 혹은 시간의 세례는 로건에게서 소중한 인연들을 앗아갔다. 로건이 타인을 구하는 행위에 신물이 나버린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쏙 빼닮은 로라만은 자신이 세상에 남기는 흔적이 될 수 있다고 로건은 확신한다. 마치 아이의 첫 울음소리를 들은 아버지처럼.

"그들의 말대로 살지마"

"이런 느낌이었구나..."

<로건>을 끝으로 울버린 시리즈는 막을 내린다. 이제금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두고 생을 마감하는 한 명의 아버지에게, 감독은 슈퍼히어로라는 무지막지한 탈을 다시 씌워주고 싶지 않아한다. 로건은 한 마리 늑대처럼 생애 전반을 붉은 피로 물들였고 스스로는 검은 고독 속에 빠져 살았지만, 한마리의 가시고기처럼 죽는다. 그의 마지막 모습은 광기와 살육이 아닌, 애틋한 부정(父情)으로 각인된다. 비로소 로건은 아다만티움 병기나 울버린이 아닌, 인간 로건이자 아버지 로건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그리고 로건은, 딸 로라만은 자신처럼 남 뜻대로 사는 실수를 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로라만은 정의니 평화수호니 하는 고달픈 슈퍼히어로가 아닌 한 명의 행복한 인간으로 살기를 바란다. 대중이 요구하는 울버린이라는 굴레가 아닌, 인간 로라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로건의 무덤에 꽂힌 십자가를 로라가 X자로 눕히는 장면과 동시에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부모는 자식에게 있어서 언제나 엑스맨이다. 자식 앞에서라면 그 어느 때나 강하고, 그 어느 때나 유능하며, 그 어느 때나 따스하다. 설령 목전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기꺼이 투신한다. 그다지 살가운 아버지도 아니고 그다지 살가운 딸내미도 아니지만, 슈퍼히어로물을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감독의 시도에 나는 무한한 박수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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