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쯤. 아마도 세번째 계절이 프러시안 블루로 물들어갈 무렵, 또 여미지 않은 재킷 자락이 때이른 삭풍에 풀럭일 무렵. 두 개의 검붉은 담뱃불똥이 포물선을 그리며 나가떨어져 가을공기에 천천히 식어간 날이 있었다. 첫번의 불똥은 제법 능숙하게 이차함수를 그리며 날아가 검은 아스팔트 위에서 늙은 별자리가 되었다. 두번째의 불똥은 꼬마 머슴아이의 오줌갈기처럼 저멀리의 어둠이 두려워 발치 끝에 볼품없이 뒹굴었다. 그렇게 튕기는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D형은 핀잔을 주었다.

독문학과 04학번 D형. 그때는 그가 더 살아온 5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도 길어보였다. 고작해야 스물다섯 먹은 그 관록을, 나같은 새내기는 영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D형이 아무리 가르쳐줘도 그처럼 멋들어지게 담뱃불똥을 튕길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D형은 고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중학생이 되기 전 돌아가셨다고 했다. 부족함 없이 커온 내가 천진난만했던 것인지, 가난이 D형을 애늙은이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선배 노릇을 한다며 내게 참치마요네즈 삼각김밥 두어개와 밀키스를 쥐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선 빈손으로 다음 수업 강의실을 향해갔다. 그 발걸음 언저리에서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면 이제 와서도 지나친 실례인걸걸까?

군을 제대하고 나와 찾아간 지금 내 나이의 그의 집엔 이미 다른 세입자가 입주해 있었다. 시나리오를 쓰겠다며 학교는 그만두었다고 풍문으로 들었다. 인연이란 것은 늘 계절의 바뀜과 같아서, 훈훈했던 동풍이 냉기를 한움큼 머금은 북풍으로 돌아서듯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기고 잊혀졌다. 문인으로 살겠다는 그를, 솔직히 조금은 한심하다고 여겼었다. 나이를 거꾸로 먹었다고, 잠깐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람이 먹고 사는 일이 참으로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언젠간 찾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인간은 신성(神性)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볼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뜬구름에 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때 나는 몰랐었다.

어느 가을 밤. 먼지가 걷히고 다시 프러시안 블루빛 하늘에 청백색 별들이 수놓이는 이 밤에 돈 맥클린의 Vincent를 틀었다. 문득 고흐와 다자이 오사무를 떠올리다가 또 문득 D형을 떠올렸다. 인간이 떠올리는 심상이란 대저 먼지와 같아서, 이곳저곳을 부유하다가도 이내는 추억이란 벨벳 커튼에 다시 붙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발에 채이는 가난을 벗삼아 나아가던 그 깡마른 뒷모습이, 그때 그 형보다 세살이나 더 먹어 능숙하게 담뱃불똥을 튕기는 지금 생각해도 가늠할 길 없이 듬직했던 것 같다. 허기에 굴복하지 않는 투지가 인간으로서의 D형을 존경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얼마 전 최영미 시인이 수영장 딸린 특급 호텔 방을 요구하는, 진심인지 (그녀의 변론대로) 작위인지 모를 글을 접했다. 예술가의 의연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녀의 글을 마냥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제목만 달아주었다면 확실히 위트있는 작위로 넘길 수 있었을거란 아쉬움은 남지만. 알마니 수트를 차려입고 미학과 사조를 읊어대는 미덥잖은 예술가라 해서 물질적인 불행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소식 들을 구멍 없는 D형도 이젠 펜 따위일랑 꺾어버리고, 어디에선가 누렇게 뜬 와이셔츠를 입고 야근을 하고 있을런지 모르겠다. 허기는 예술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한다. 세상살이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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