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과 유럽


지난번에 이야기했듯이 오스만은 붕괴직전의 거인이었어. 그렇지만 유럽 강대국들 입장에서 오스만이 무너져버리거나, 혹은 한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될 경우 유럽 전체의 세력균형을 깨뜨릴 위험이 있었지. 따라서 골골대는 병자라도 살려둘 필요가 있었던거야. 물론 모든 유럽 세력들이 이처럼 오스만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지만, 가장 탐욕스러운 눈으로 오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러시아였지. 오스만의 지형을 보면 알수있듯, 다르다넬스-보스포로스 터키해협은 바로 러시아가 흑해에서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루트이자, 영국해군이 러시아로 침투할 수 있는 루트였지. 2차 동방문제로 인해 오스만이 반역자 이집트와 옥신각신하고 있는 순간을 노려 러시아는 오스만을 거의 반보호령화 했어.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인해 오스만에 대한 이권을 어느정도 뱉어내긴 했지만 여전히 오스만은 러시아의 앞마당 정도로 여겨지는 지역이었지.


대프랑스 협조체제에서 대러시아 협조체제로

크림전쟁은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나폴레옹 전쟁과 유사해. 급속도로 성장하는 하나의 강대국을 상대하기 위해 거의 전유럽이 동맹을 맺어 전쟁을 치루었다는 점에서 말이지. 이번에는 상대가 러시아였어. 크림전쟁의 판도가 러시아 대 오스만/프랑스/영국/사르디니아(...)였으니 말이지. 일단 가장 먼저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영국이었어. 러시아가 터키해협을 가져가게 되면 영국해군의 우위가 위협받을 뿐더러, 오스만이 골골대면 골골댈수록 러시아의 영향력을 커져만 갔고,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게 되면 러시아를 어찌하지 못할 순간이 다가오게 될거라 우려했어. 프랑스 나폴레옹 3세 또한 영국의 의견에 동조했는데, 이는 1815년 체제가 자신들 프랑스만을 견제하기 위해 구축된 체제였고, 이 체제를 타파하고 반러시아 체제를 구축하길 바랬던거지. 오스만이 지속적인 러시아의 꼬장에 불만을 갖게된 건 말할 필요도 없을거야.


전쟁의 발단

가장 먼저 시비를 턴 건 프랑스였어.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제국 측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리를 복원하라며 압박(1852)했어. 그런데 이 구역의 전통적인 미친년보호자는 바로 러시아였지. 러시아도 똑같이 오스만 측에 그리스 정교회의 권리를 복원하라며 압박하기 시작(1853)해. 그런데 웬걸, 프랑스가 요구할 때까지만 해도 예~예~ 하던 오스만이 러시아가 요구하자 갑자기 거절하기 시작해. 더군다나 가만히 있던 영국까지 프랑스 편을 들며 러시아의 오스만 압박을 견제하고 나서지.

cf) 참고로 교회의 권리를 복원한다는 것은 그 국가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획책하는 거야. 오스만은 이슬람 국가이고, 오스만 내의 교회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은, 기독교 국가들이 그 교회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지.


골골대는 병신병자인줄 알았던 오스만과 영국-프랑스가 한꺼번에 러시아에 대적하고 나서자 러시아 차르는 격노했어. 러시아는 오스만 측에 최후통첩까지 보내며 재차 압박을 가했는데, 이에 영국-프랑스도 지지않고 오스만 근해에 함대를 파견하여 오스만을 지원해줘. 오스만도 강대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다시 한번 러시아의 압박을 거절해버리지. 차르의 권위가 말이 아니게 된 러시아는 군대를 동원하여 몰다비아Moldavia와 왈라키아Wallachia 공국을 점령해. 오스만에서 거의 전쟁 직전의 상황이 연출되자 가장 불안한건 바로 오스트리아였어. 영국/프랑스/오스만 대 러시아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결과가 어떻게 되든 오스트리아에게는 불리한 판이었지. 러시아가 승리하게 된다면 오스만은 온전히 러시아의 영향권에 복속될 거고,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의 완충지대를 잃고 그 강력한 러시아군과 정면으로 맞붙어야할 지경이었어. 그렇다고 영국/프랑스/오스만이 승리한다고해도, 이렇게 강대국 간의 분열이 생기면 가장 손해를 보는 쪽은 오스트리아였어. 오스트리아가 영국/프랑스와 러시아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이상, 이들간의 분열이 생겼을 때 어느 편을 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거든. 오스트리아가 영국/프랑스의 편을 들면 러시아에게 털릴 것이요, 러시아의 편을 들면 당장 영국/프랑스에게 보복당할 지경이었지.


이에 오스트리아는 오스만과 러시아 측에 중재안을 제시(1853.7)하게 돼. 사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영국-프랑스라는 강대국과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어. 이미 오스만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망조가 보였고, 자연스레 오스만이 망하면 러시아가 스리슬쩍 터키해협을 먹으면 되는 거였어. 그를 위해 오스만에 그렇게 침투를 했던 거였고. 시간은 러시아의 편인데 굳이 두개의 강대국과 피터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중재안을 못이기는 척 수용해. 그러나 영국에서는 이참에 러시아를 밟아놔야한다는 Palmerstond을 필두로하는 대러시아 강경파가 득세했고, 오스만 또한 모처럼 강대국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는데 이번참에 아예 러시아와 결판을 보길 원했지. 따라서 영국/프랑스/오스만은 오스트리아의 중재안을 거절하고, 오히려 러시아에게 몰다비아-왈라키아 공국에서 군대를 철군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내. 러시아가 연합군 측의 최후통첩을 묵살하고 결국 전쟁이 발발하지.


cf) 제국, 왕국, 공국의 차이는 뭘까? 말그대로 제국은 황제가, 왕국은 왕이, 공국은 왕자가 다스리는 나라지. 사실 제국과 왕국의 차이는 크다고 볼 수 없고, 굳이 따지자면 공국은 자치권을 가진 반독립국이라 할 수 있어. 왕자가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주권자는 따로 있었지. 가령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의 경우, 실질적인 통치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부임한 Prince이지만, 명목상 주권자는 덴마크 왕이었지.


크림전쟁의 양상


영국-프랑스-오스만의 전략적 목표는 바로 러시아 흑해함대의 궤멸, 즉 흑해로 치고들어가는 것이었지. 왜 육상을 놔두고 해상을 공략했을까? 러시아는 당대 최강의 육군국가로 여겨지고 있었고, 그런 러시아 육군의 주요병력은 모두 서부러시아(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 유럽 러시아)에 집중되어 있었지. 프랑스도 만만찮은 육군국가였지만 나폴레옹의 패배로 인해 유럽 전체로부터 제재를 받아왔기 때문에 러시아와 직접 대결하는 것은 무리였어. 게다가 프랑스군과 러시아군이 지상전을 벌이게 된다면 그 전장은 바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중간지점인 오스트리아나 프러시아가 될 확률이 높았는데,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이를 곱게 받아들일리도 없었지.


참고로 영국-프랑스-오스만 연합군에는 이탈리아의 유력국가였던 사르디니아도 합류(1855.1)했어. 오스트리아가 사실상 크림전쟁에서 중립입장을 견지하자 영국-프랑스 입장에서는 동맹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고, 사르디니아 또한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강대국들의 지지와 지원이 절실했어. 더군다나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반도를 놓고 경쟁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사르디니아는 이런 프랑스를 등에 업고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고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지. 아무튼 이렇게 영국-프랑스-오스만-사르디니아 연합군(이하 연합군)이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게 되었어.


연합군 측은 계획대로 러시아 흑해함대의 모항인 세바스토폴Sebastopol을 공략하기 시작했어. 6만여명의 연합군 병력이 세바스토폴이 있는 크림 반도에 상륙(1854.9)하여 세바스토폴 요새를 포위공격하였지. 그런데 이게 웬걸, 당대 최강이라고 여겨졌던 러시아군은 고전에 고전을 거듭했어. 러시아군은 상당한 군수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러시아 중심지역(서부 러시아)에서 전장인 크림반도까지 군수물자와 추가병력을 파견하는 데 무려 3개월(!)이 걸렸지. 또한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 중 산업화가 가장 더딘 편이었는데, 이 3개월간의 거리가 무려 포장되지도 않은 비포장 도로였었지. 그때 당시로 10명이 출발하면 크림반도에 살아서 도착하는 사람은 1명 꼴이라는 말도 있어. 거기에다가 연합군 측은 해상수송이었기에 병력들의 피로도가 상당히 덜했던 반면, 러시아군은 육상수송(이라고 쓰고 행군이라고 읽는다)이었기 때문에 병력들의 피로도가 극심했지. 크루즈선 타고 띵가띵가 온 놈이랑 3개월 내내 행군하고 온 놈이랑 누가 더 잘 싸울진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해. 결국 세바스토폴은 연합군에 의해 함락(1855.9)되지. 연합군은 이에 끝나지 않고 계속하여 러시아 본토로 밀고들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포격을 가하기도 하지.


연합군은 실제 전장 이외에서도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폴란드와 코카서스 지방의 소수민족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한거야. 러시아가 아무리 슬라브족의 종주국이라고는 해도, 그 넓디넓은 땅에 슬라브인만 살리는 없잖아? 더군다나 폴란드의 경우 이전에도 수차례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지방이기에 러시아의 인적, 경제적, 물적 피해는 엄청났어.


오스트리아의 중재와 전쟁의 종결

오스트리아는 크림전쟁으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다고 했지? 크림전쟁이 장기화되자 가장 급했던 것 또한 오스트리아였어. 전쟁이 장기화되고 연합군 측이 승세를 타긴 하는데, 여기서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의 편에 서자니 종전 이후 러시아가 자신들에 대해 이를 부득부득 갈 것이 두려웠지. 그렇다고 한창 먼지나게 얻어맞고 있는 러시아의 편에 설 수도 없었고 말이야.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유럽 대륙에서 점점 고립되어만 갔지. 또 한가지는, 위에서 말했듯 연합군이 러시아를 약화시키기 위해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했지? 이는 다민족제국인 오스트리아에게도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어. 오스트리아 또한 폴란드 지방을 프러시아, 러시아와 사이좋게 나눠먹고 있는터라 이 지방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면 자기들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것이었지.


연합군 측도 종전을 바라고 있는건 마찬가지였어. 아무리 러시아군이 고전했다고는 하지만, 크림전쟁은 생각이상으로 장기화되어 재정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가중되었지. 뿐만아니라 인명피해 또한 패전국인 러시아뿐 아니라 승전국인 연합군까지도 엄청났어. 또 러시아군이 끈질기게 항전하는 바람에, 연합군은 세바스토폴 함락 이후에는 이렇다할만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어. 전쟁의 비용이 효용보다 커지게 되는 손익분기점이었던 셈이지. 탈탈 털리고 있던 러시아 입장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결국 오스트리아의 주도로 비엔나에서 연합군-러시아 간 평화회담이 개최돼. 오스트리아는 당시로서 러시아에게 상당히 관대한 평화조건을 제시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오스트리아도 연합군 측에 가담하겠다며 전쟁협박을 하지(...). 여기서 관대하다는 것은, 나폴레옹 이후 체제에서도 보면 알듯, 어디까지나 "탈탈 털린 것치고는 덜 빼앗겼다"고 봐야지, 정말 쿨하게 승전국들이 전리품을 안챙겼다는 게 아니야. 크림전쟁을 종결시킨 파리조약(1856.3)으로 러시아는 더이상 흑해에 함대와 해군기지를 보유하지 못했고, 오스만에 대한 내정간섭을 중단해야 했으며, 몰다비아/왈라키아 공국에 대한 영향권을 포기해야 했지.


크림전쟁 이후

크림전쟁은 패전국인 러시아에게나, 승전국인 영국-프랑스-오스만에게나, 심지어 중립국인 오스트리아에게나 실질적인 이득은 거의 안겨주지 못했어. 그도 그럴것이, 승전보를 울리기 위해 치러야했던 희생이 너무나도 컸지. 러시아가 50만, 오스만이 40만, 프랑스가 10만, 영국이 2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기록했지.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점차 수정주의 국가화되었어. 기존 러시아는 프랑스를 압박하기 위한 비엔나 체제(1815년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상당히 보수적인 성격이 짙었지. 그러나 크림전쟁으로 인해 모든 유럽체제가 러시아를 견제하는 체제로 바뀌었고, 크림전쟁 중 나타난 러시아 사회와 군대의 심각한 비효율성 등이 조명되기 시작했어. 러시아 입장에서는 이런 모든 체제적 요인들을 뒤짚을 필요가 생기게 되었지. 정확히 자신들이 압박하던 프랑스와 입장이 바뀌어 버린거야.


영국 또한 전쟁으로 얻은 이익은 미미했어. 원래 영국이 크림전쟁을 감행했던 것은 러시아를 사실상 재기불능 상태까지 밀어넣기 위함이었지. 그러나 심각한 재정적/인명적 피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가 극렬히 전쟁을 종결시키고자 나서니까 영국도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사라졌어. 이후 영국은 유럽사에 국력을 쏟지 않고 해외식민지나 정복하러 다니는 등 고립주의 정책을 택해.


그나마 좀 이득을 얻은 나라라면 프랑스인데, 일단 1815년 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을 향했던 유럽의 제재들을 모두 러시아에게 전가하는 데 성공했지. 또한 러시아 육군이 무너지면서 프랑스는 다시금 유럽의 제1육군국으로 거듭났어. 기세가 등등해진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삼촌 시절 이후 뼈아프게 압박당해왔던 과거를 잊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펴게 되지.


오스트리아의 경우 상기 설명한 것과 같이 크림전쟁으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고 결국 손실만 입었지. 영국과 프랑스와의 외교관계가 약화된 것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보호령이었던 사르디니아가 승전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점점 득세하고 있었지. 러시아와의 관계도 무척이나 악화되었는데, 지난 시간 1848년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지방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대신 이를 진압해준 것을 배웠지. 러시아는 내심 오스트리아가 자신들의 편에 서서 전쟁까지는 아니더라도, 친러시아적인 중립입장을 견지하길 기대했어. 뭐 오스트리아도 나름 러시아에게 관대한 평화조건을 이끌어내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전쟁을 종결시키고자 러시아에게 "너네 이거 안받아들이면 나도 연합군 편에서 싸울거임"하며 위협하는 바람에 오스트리아-러시아 관계는 악화일로의 길을 걷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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