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디니아의 부상

(이 조그만 도시국가가 이탈리아 통일의 선봉장이 된다. 아 물론 그때 당시에는 Piedmont 지방인 북서부 이탈리아까지가 사르디니아의 판도였다.)


18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통일정부가 들어서지 못하고 여러 중소 도시국가들이 난립하고 있었지.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민족주의의 물결은 이탈리아 반도도 피해가지 않아서, 이탈리아 내부에서도 통일정부 수립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어. 특히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오스트리아의 보호령으로 전락하자 이러한 민족주의적 요구는 더욱 커졌지.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주축이 된 도시국가가 바로 사르디니아Piedmont-Sardinia(혹은 사르데냐)야. 사르디니아는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이미 1848년에 오스트리아에 항거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한 바 있지. 1852년에는 카밀로 카부르Camillo Cavour가 총리 겸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사르디니아의 부국강병을 추진하기 시작했어. 이렇게 사르디니아는 독립운동의 맹주가 되었을 뿐 아니라, 독자적인 실력양성을 꾀하며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했지.


그러나 본디 소국에 불과한 도시국가가 아무리 성장한다고 해서 오스트리아와 같은 전통적인 제국에 맞서기는 매우 힘들어. 비록 잦은 소수민족 봉기에 오스트리아도 이전의 오스트리아가 아니었지만, 사르디니아와 같은 약소세력이 단독으로 대적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 이에 따라 사르디니아는 오스트리아의 경쟁국인 프랑스와 적극적인 연대를 꾀하기 시작해. 가장 대표적인 것이 1855년 크림전쟁의 참전이었지.


크림전쟁 이후에도 사르디니아는 프랑스와의 계속적인 동맹을 추구해. 결과적으로 1859년에 프랑스와 사르디니아는 동맹을 체결하기에 이르지. 프랑스와 사르디니아는 오스트리아 견제라는 공통된 목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 다만 프랑스-사르디니아 조약은 상당부분 불평등한 부분이 많았는데, 사르디니아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돌입할 경우 프랑스가 지원하기로 약조한 대신, 이러한 전쟁의 모든 비용은 사르디니아가 부담해야했어. 또 사르디니아가 롬바르디, 베네치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탈환하는 대신, 원래 사르디니아의 영향권인 북서부 이탈리아의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가 가져가기로 했지.


크림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단 말은 지난시간에 했었지? 사르디니아에게는 그야말로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적기였지. 오스트리아의 경쟁국인 프랑스가 사르디니아와 동맹을 체결했을뿐 아니라, 영국도 고립주의 노선을 걸으며 유럽사에 관여하지 않으려했고, 러시아도 오스트리아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오스트리아 편을 들리가 없었지.


이탈리아 통일전쟁

(녹색이 사르디니아의 본래 판도. 녹색 위에서 왼쪽 구석탱이 부분이 프랑스가 홀랑 가져가버린 니스와 사보이 지방이다. 북부 이탈리아인 롬바르디는 프랑스-사르디니아 동맹 때 수복, 베네치아는 보오전쟁 때 수복하게 된다.)


사르디니아는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선공을 이끌어낼 필요가 있었어. 물론 오스트리아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통일에 프랑스가 끼어든 이상, 영국과 러시아가 마냥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했지. 이에 프랑스 나폴레옹 3세가 러시아를 설득하여 러시아의 중립 약속을 받아냈고, 남아있는 영국이 오스트리아 편을 들지 못하도록 오스트리아의 선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사르디니아가 깐족거리기 시작했어. 바로 예비군 동원령을 선포한거지.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이새끼들이 반란진압한지 몇년이나 지났다고!" 하며 당장 동원령을 철회하라는 최후통첩을 사르디니아에 전송하지만, 그대로 묵살, 오스트리아는 사르디니아에 선전포고(1859)를 하게 돼. 정확히 사르디니아와 프랑스가 계획한대로 흘러간 것이었지.


이렇게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시작되고, 프랑스군이 2차례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를 거두게 돼. 반면 사르디니아군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어. 정작 통일의 당사자인 사르디니아가 군사적, 경제적 기반이 너무 미약한 나머지 전투를 할 수가 없었던 거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프랑스 나폴레옹 3세도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어. 애초에 사르디니아를 도와 오스트리아와 전쟁할 명분도 없었을 뿐더러, 사르디니아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나오니 뭣하러 남의 나라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해야하나 하는 회의감도 들게 됐지. 게다가 가재는 게 편이라 했던가? 가만히 있던 프러시아가 동원령을 선포하며 프랑스를 위협하기 시작했어. 더군다나 혹여나라도 사르디니아가 이탈리아를 통일한다손 쳐도, 그 강력하고 거대한 통일 이탈리아가 친프랑스적인 성향을 유지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지.


이런 계산 속에 프랑스는 단독으로 오스트리아와 화친해버려. 그리고서 사르디니아에게는 기존에 약속했던 니스와 사보이를 요구하지. 롬바르디는 프랑스의 승리로 오스트리아에서 사르디니아로,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가 그대로 유지, 니스와 사보이는 사르디니아가 프랑스에게 할양하게 돼. 그리고 사르디니아가 북부~중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것에 대해 프랑스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기로 했지. 거꾸로 사르디니아도 나름 프랑스에 열받게 되는데, 자신들이 제대로 전투하지 못한 건 생각안하고선, 꼴랑 두번 싸워놓고선 니스와 사보이를 홀랑 가져가버렸으니 자기들도 배신감을 느낀 셈이었지. 이렇게 프랑스-사르디니아 동맹은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양국간 정서만 악화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지.

cf) 후에 프러시아가 프랑스를 탈탈 털게된 보불전쟁에서 이탈리아가 프러시아 편에 서게되는 결정적 원인이 돼.


(사실상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은 가리발디였다. 정작 이탈리아 정부군은 가리발디의 점령지를 확인하는 정도에만 그쳤을 뿐이다. 가리발디가 상남자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집권자는 가리발디였음이 자명하다.)


이렇게 흐지부지 되어버린 오스트리아 전쟁계획은 잠정적으로 포기한 사르디니아는 이탈리아 반도 정벌에 총력을 기울여. 특히 이탈리아 민족주의자인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의 의용군(붉은 셔츠를 입고 다닌다해서 Thousand Red Shirts라고 불리움원조붉은악마)은 시칠리와 나폴리를 점령(1860), 북부와 중부 도시국가들도 사르디니아를 중심으로 모두 통일되지. 이후 이탈리아 국민의회가 구성, 1861년에는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이 수립되었어.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는 보오전쟁에서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로부터 베네치아를 수복(1866), 보불전쟁에서 마찬가지로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대적했지.

cf) 아까 말했던 사르디니아의 총리인 카부르는 상당히 정치적인 인물로서, 이탈리아 내에서 최고조의 인기를 누리던 가리발디를 견제하고자 별의별 노력을 다했어. 그러나 생각외로 가리발디는 권력에 달리 욕심이 없었고, 자신의 점령지를 모두 사르디니아 왕 Victor Immanuel 2세에게 헌납한다고 선언하지. 상남자였네?

'역사 이야기 > 근대 외교사(1800-19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독일 통일 2편  (6) 2013.09.21
(8) 독일 통일 1편  (4) 2013.08.27
(6) 크림전쟁  (8) 2013.08.27
(5) 1848년 혁명전염  (0) 2013.08.25
(4) 오스만의 약화  (1) 2013.07.0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