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통일담론

(청색부분이 프러시아의 판도, 황색부분이 오스트리아의 판도. 나머지 회색부분은 각자 독립해있던 도시국가들의 판도이다.)


독일 또한 이탈리아처럼 통일된 중앙정부를 갖지 못하고 나라가 발기발기 찢어져있는 상태였어. 그나마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독일계 민족국가 중에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 그러나 독일도 마찬가지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민족주의 물결을 피해갈수는 없었어. 독일의 통일 담론은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는데, 이미 1815년에 독일연합German Confederation이 결성된 바 있지. 그러나 이 독일연합은 정말 독일국가들이 통일을 원해서 결성한 것이 아니라, 강대국들이 프랑스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최전선인 독일지방을 하나로 엮어 강력한 방파제 역할을 시키기 위함이었어. 따라서 시간이 감에 따라 흐지부지되고 말았지.


1848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의회Frankfurt Parliament가 개최되어 독일통일에 대한 진지한 담론이 시작돼. 당시 독일통일에 대한 담론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었는데,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가 그것이었지. 대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를 통일독일의 맹주로 삼아. 프러시아가 독일 내에선 강대한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국제무대에만 나가면 빌빌거리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국제무대에 내놔도 손색없는 강대국임이 대독일주의의 핵심 근거야. 반면 소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의 통일주도권에 의문을 제기하지. 오스트리아의 지배층은 물론 독일계이지만, 근본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다민족제국이야.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항상 분리독립에 대한 리스크를 갖고 있었지. 지난 시간에 설명했듯, 헝가리 지방만 독립해도 오스트리아는 거의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상실하게 되지(현대 오스트리아가 왜그렇게 작은 영토를 가졌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따라서 소독일주의자들은 독일계가 다수를 이루는 프러시아가 독일통일의 맹주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해. 

cf) Confederation은 매우 느슨하고 낮은 단계의 연합체를 의미한다. 반면 Federation은 비교적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의미하지. 미국 남북전쟁 당시, 지방정부의 권한강화와 연방정부의 권한약화를 주장하던 남부가 자신들을 Confederation States of America으로 지칭한 것에서도 알수있지.


이러한 소독일주의자들의 주장은 1848년 일련의 민족혁명으로 오스트리아가 골머리를 썩자 그 모멘텀을 얻게 되었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는 독일헌법을 제정하고 통일독일의 통치권을 프러시아 국왕에게 위임하는 시도까지 이루어져. 그러나 프러시아 국왕은 이를 거절해. 왜 프러시아 왕은 통일독일의 통치권이라는 거대한 감투를 포기했을까? 바로 주변 강대국들의 견제가 걱정되어서였지. 지난 시간 이탈리아 통일과정에서도 프랑스가 한발짝 물러섰던 것이 바로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의 등장이었어. 발기발기 찢어져있던 국가가 하나로 통일되는 일은 아예 국제정세의 판도 자체가 바뀌는 것을 의미했기에 독일 통일에도 강대국들이 가만 있을리가 없었지. 특히 독일지방과 접경한 프랑스가 이를 가만 보고 있을리가 없었어.


프러시아의 급부상과 오토 폰 비스마르크

(흔히 철혈재상이라고 알려져 마치 장군의 느낌을 주는 비스마르크는 오히려 문골이었고, 전쟁보다는 외교로 더 유명하다. 더군다나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어낸 배상금을 사회복지제도 마련에 쓰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빼고서 프랑스의 역사를 말할 수 없듯이, 비스마르크를 빼고서 독일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어. 1861년 빌헬름 1세가 프러시아 국왕 자리에 앉았을때 프러시아의 국내상황은 상당히 혼란스러웠어. 프러시아는 상당부분 산업혁명이 이루어진 상태였고, 이로 인해 성장한 부르주아층이 사사건건 의회에서 왕당파와 충돌하고 있었지.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k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때(1862)였어.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현실주의 정치가였고, 프러시아의 부국강병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


비스마르크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외교천재라는 것이 많아. 또한 그것은 사실이지.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비스마르크의 외교망은 사실 예술에 가까워. 혹자는 비스마르크의 유일한 실수는, 후임자들이 도저히 그의 작품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하지. 비스마르크가 프러시아의 부국강병, 독일통일, 독일의 제1세력화와 강대국들의 견제 방지 등 수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야. 그렇지만 동시에 독일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했고, 쓸데없는 왕권과의 충돌 때문에 결국 그 자신이 총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지경에 이르지.


독일 통일 과정

폴란드 폭동(1863) : 1863년,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다시한번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발생해. 러시아가 이를 진압하려 하자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가 맞서지. 프러시아만이 러시아의 편을 들었는데, 이렇게 강대국들이 분열된 사이 러시아는 알아서 폭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 영국 : 크림전쟁 이후에도 반러시아 정서가 강해서 러시아의 폴란드 폭동 진압을 반대하지만, 그다지 적극적이진 않았어. 이미 고립주의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고, 혹여나 러시아가 영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폴란드 폭동을 진압한다고해도 다시한번 전쟁을 치를수는 없었지.


§ 프랑스 : 프랑스는 애초에 분리독립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면 자신들의 경쟁국인 오스트리아가 약화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누차 말했듯, 오스트리아는 다민족제국이었기 때문에 한 민족이 들고 일어나면, 옆에 있던 다른 민족도 들고 일어나 나라꼴이 개판 5분전이 되기 쉬웠기 때문에 프랑스 입장에선 피한방울 안흘리고 경쟁자 오스트리아를 약화시킬 수 있던 기회인 셈이지.


§ 오스트리아 : 그렇다면 오스트리아는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독립운동을 러시아가 알아서 진압해주겠다는데 왜 반대하고 나섰을까? 오스트리아의 당시 시급한 문제는 바로 외교적 고립에서 탈피하는 것이었지. 비록 프랑스 새끼들이 얄밉게 자신들의 약화를 노리고 있었고, 영국은 별 관심도 안보이는 듯 했지만, 영국-프랑스 편에 끼어서 같이 목소리라도 내면 외교적인 고립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었어.


§ 프러시아 : 한편 프러시아는 오히려 러시아 편을 들고 나서. 애초에 러시아가 프러시아에 꽤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뿐더러, 프러시아가 독일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싫어도 거쳐야하는 전쟁이 두 개 있었어. 바로 오스트리아와의 전쟁과 프랑스와의 전쟁이지. 독일 지역 내 맹주를 가리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와도 한판 붙어야했고, 독일통일을 저지하려는 프랑스와도 한판 붙어야하는 것은 피할래야 피할수가 없었어. 프러시아는 그나마 러시아의 우호를 살 필요가 있었고, 그래야만 이후의 두 차례 전쟁도 잘 풀릴것이라 예상했지. 계획대로 프러시아가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단 한차례도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켜주지.


덴마크 전쟁(1863) : 이건 1848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전쟁이었어. 우유나 짜고 치즈나 만들것 같은 덴마크가 또한번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흡수통합하고자 헌법을 개정(1863)하지. 이에 같은 독일계 국가인 프러시아-오스트리아가 공동으로 덴마크에 최후통첩을 보내서 흡수통합을 포기할 것을 압박해. 그러나 덴마크 왕은 들을 체도 안했는데, 일단 덴마크 왕도 민족주의적 열망이 대단했고, 또 프러시아-오스트리아와 전쟁이 벌어지면 영국-프랑스 등이 덴마크를 지원할 것이라 자신했지. 결국 프러시아-오스트리아는 덴마크를 침공하였고, 덴마크군이 탈탈 털리는 동안 영국과 러시아는 오지 않아. 영국과 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미국 남북전쟁에 눈이 뒤집혀 있었고, 러시아는 이미 프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였기 때문이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사이좋게 나눠먹게 돼.


(중간에 빨간 부분과 오렌지색 부분이 프러시아가 차지한 슐레스비히. 맨 아래 노란 부분이 오스트리아가 차지한 홀슈타인이다. 홀슈타인 아래는 프러시아의 판도였기에 프러시아-슐레스비히의 길목은 막혀있는 상태. 마찬가지로 홀슈타인-오스트리아의 길목은 프러시아로 막혀있었다.)


프러시아-오스트리아의 갈등 : 덴마크 전쟁의 결과로 프러시아는 슐레스비히를, 오스트리아는 홀슈타인을 각자 갖게 되지. 그런데 애초에 이 나눠먹기에 문제가 있었는데, 오스트리아와 홀슈타인 사이에는 프러시아가 떡하고 자리잡고 있었어. 또한 마찬가지로 프러시아와 슐레스비히 사이에는 오스트리아령인 홀슈타인이 떡하고 자리잡고 있었지. 나눠먹긴 했는데 도저히 자기들이 먹은 영토를 관리할 수가 없던거야. 북부독일을 완전히 제패하고 싶어하던 프러시아는 지속적으로 오스트리아에게 홀슈타인을 양도하라고 꼬셨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가 자기들과 동맹을 체결하지 않으면 뱉어낼 생각 없노라고 거절해. 그러나 프러시아 입장에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체결하게 되면 기껏 러시아와 좋은 관계 만들어놓은 것에 재뿌리는 것과 다름없었지. 어차피 독일 통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도 불가피했고말야. 이에 비스마르크는 서서히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며 오스트리아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발품을 팔지.

§ 영국 : 남북전쟁, 국내 투표권 문제 등으로 국내정치에 바빴고, 고립주의 성향 유지.


§ 프랑스 : 프랑스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 전쟁이 벌어지면 상당한 국력소모전이 될 것이라 생각했어. 그렇게 되면 둘다 지치게 될 것이고, 프랑스는 피한방울 안묻히고 두 경쟁자를 제거하는 이득을 얻을 수 있었지. 순 나쁜 놈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너네 프랑스가 중립지켜주면 영토도 조금 줄수도 있어"라며 애매하게 영토보상을 약속했고, 야망이 대단했던 나폴레옹 3세는 이 말에 따르게 돼. 따라서 프러시아-오스트리아 간 전쟁이 일어나면 프랑스는 중립을 지키겠노라 약속해.


§ 러시아 : 러시아는 일단 크림전쟁에서 오스트리아에게 상당히 악화된 감정을 갖고 있었어. 또한 폴란드 폭동 당시 프러시아가 자신들 편에 서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따라서 비스마르크의 의견대로 러시아도 중립을 지키겠노라 약속하지.


§ 이탈리아 : 이탈리아는 두말할 것 없이 프러시아 편을 들었지. 오히려 이탈리아는 프러시아와 동맹을 체결하여 오스트리아와 싸우겠노라고 약속해. 이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미처 얻지 못한 베네치아 지방을 얻고자 했지.


§ 독일연합 : 독일연합의 대부분 국가들은 오스트리아를 지지했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보다는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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