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보오전쟁)

(중간에서 약간 우상향에 Kingdom of Prussia가 보인다. 다른 세력들에 눌려 기도 못펴던 저 작은 국가가 1800년대 중반~1900년대 중반까지 거의 1세기동안 유럽사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이때까지 유럽사에서 존재감을 거의 드러내지 못했던, 어쩌면 강대국이라는 감투조차도 과연 알맞은 것인가 싶을 정도였던 프러시아는 그야말로 은둔고수였지.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이 그들의 덩치를 키우는 데 몰두했다면, 프러시아는 작은 덩치이나마 그들의 힘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지. 많은 이견이 있을테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프러시아의 이러한 진화는 바로 나폴레옹 프랑스의 몰락 이후라고 판단해. 같은 근대유럽사 분류의 1편(링크 참조)을 보면 알듯이, 프랑스는 국민개병제를 유럽강대국 최초로 도입함으로써 엘리트 직업군 중심의 소수정예 중세군대를 대규모 국민군대로 진화시키는 데 일조했지. 그러나 실상은 나폴레옹 개인의 군사적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프랑스가 유럽을 제패할 수 있었던거지, 나폴레옹만 없었어도 프랑스가 그렇게까지 점령의 판도를 넓힐 수는 없었을거야. 국민개병제도는 프랑스의 사례 이후 다른 강대국에서도 속속 채택했기 때문이지. 다만 프러시아는 조금 달랐는데, 기본적으로 육군이 강세인데 더해서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국민개병제도 도입, 군사학교 설립(최초의 사관학교), 총참모부의 도입을 추진했어. 프랑스가 어떻게 하면 대규모의 군대를 끌어모을까 고민하는 동안, 프러시아는 한차례 더 나아가 그 대규모의 군대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굴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 것이지.


이에 더하여, 크림전쟁으로 인해 패전국인 러시아는 물론이요,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인적 손실에 허덕이고 있었고, 오스트리아도 국내외의 분리독립 운동을 진압하며 국력이 쇠락하고 있었던 반면, 프러시아는 비교적 이러한 유럽사의 소용돌이에서 요리조리 잘 피해가며 내실있는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었어. 산업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당시 기준으로는 철도였지. 원자재 생산지와 가공하는 공장을 잇는 국가의 혈관과 같은 철도에서 프러시아는 아주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었어(사실 프러시아가 다른 강대국에 비해 판도가 작아 철도를 깔 면적도 넓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우리나라랑 똑같네?). 그러나 사람이란 항상 무서운 존재라서 뭔가 하나를 발명하면 그걸 어떻게해서 남을 죽이는 데에 사용할까를 고민하는 존재야. 바로 철도도 예외는 아니어서, 프러시아는 이러한 철도를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곳곳에 병력과 보급품을 운송할 수 있는 전략철도망의 구축에 힘쓰지.


아무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다른 강대국들은 이러한 프러시아의 내부적인 개혁을 알리가 없었어. 지금껏 유럽에서 없는 국가 취급받아왔고, 그렇기에 쓴물도 마셔야했던(나폴레옹에 대한 강경한 대응 주장했지만 좌절) 프러시아가 아무리 이빨이 빠져도 여전히 치타급은 되는 오스트리아와 맞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국가는 없었어. 혹 정말 이긴다해도 상당한 소모전이 될거라 생각했지. 이 때문에 그 많은 유럽국가들이 프러시아-오스트리아 전쟁을 묵인해주었던 이유야. 첫째로 오스트리아가 크림전쟁 때 지나치게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둘째로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전쟁한다고해도 다른 강대국들의 이익에는 별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지.

cf) 이탈리아만은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와 베네치아를 수복하고자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어.


(파란 부분이 프러시아의 판도, 노란 부분이 오스트리아의 판도, 회색 부분이 독일연합의 듣보잡 국가들. 저 회색부분마저도 보오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의 편이었으니, 가히 프러시아의 승리가 얼마나 대단한 이슈였는지는 알만하다.)


그런데 전쟁의 양상은 예상과는 빗나간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해. 일단 프러시아가 독일연합의회 측에 "야 우리 오스트리아 저새끼들 연합에서 빼버리자"하며 오스트리아의 화를 돋구었고, 이에 오스트리아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긴 했어. 오스트리아가 승리할 것으로 예상한 독일연합 측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프러시아에게 선전포고를 했지. 그런데 이게 왠걸, 여기에 달리 쓸말도 없이 전쟁은 2주만에 프러시아-이탈리아 동맹의 완승(1866.7)으로 끝나버렸지. 그렇다면 프러시아가 어떻게 오스트리아를 이겼을까?

ⓐ 전장식 소총과 후장식 소총 : 당시까지만 해도 오스트리아는 모두 전장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어. 전장식 소총이란 총구에 총알과 화약을 꼬챙이로 쑤셔박아(...) 장전하는 총이지. 그런데 이게 총열에 새겨져 있는 강선에 잘 맞물려야하는데, 그러려면 총알이 총열지름보다 약간 더 클 필요가 있었어. 자, 총열보다 약간 큰 총알을 꼬질대로 쑤셔박는 모습을 상상해보길 바래. 군필자들이라면 총기수입할때 꼬질대가 더럽게 안들어가던 그 기억을 떠올려보면 될거야. 그걸 한발 쏠때마다 한다고 생각하면 편해. 게다가 한발을 장전하기 위해선 자기 키보다 큰 총을 세로로 세우고 일어서서 장전을 시켜야하지. 그러나 프러시아는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이 소총의 장점은 바로 빠른 장전과 동시에 장전할 때 안일어서도 되기 때문에 엎드려쏴가 가능하다는 거였지. 전장에서 엎드려쏴가 가능하냐 안하냐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을게.

ⓑ 전략철도망 : 오스트리아도 프러시아에 만만치 않은 대군을 갖고 있었어. 솔직히말해서 장비같은건 좀 외적인 문제긴하지. 오스트리아가 병력만 제대로 전개시킬수 있었어도 승산이 있었을거야. 그러나 아무리 대군이고 강력한 군대여도 형편없는 교통으로 인해 병력을 투사할 수가 없고, 병력을 투사해도 보급품을 전달해줄 수가 없다면 강력한 군사력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되는거지.

ⓒ 리더십 : 프러시아는 당시 참모총장 헬무스 폰 몰케Helmuth von Moltke가 지휘하고 있었지. 이 참모부라는 건 상당히 중요한 군사적 이슈인데, 사실 예전까지만 해도 유능한 장군 개인의 판단에 군사행동을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어. 그러나 아이큐 150인 한사람보다 아이큐 90인 다섯사람이 총아이큐가 더높듯이 대가리 하나보단 대가리 둘이, 대가리 둘보단 대가리 셋이 나은 법이지. 게다가 참모부는 이러한 대가리들의 회의결정체다보니 지휘체계가 분산되는 것도 아니었어. 프러시아는 이러한 참모부 시스템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었지.

ⓓ 전선 분할 : 개인적으로 이 요소가 전쟁에서 가장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 1차대전의 독일의 패착도, 2차대전의 독일의 패착도 결국은 동서로 무분별하게 전선을 팽창했기 때문이었다고 봐. 참 우습게도 이러한 미래의 자신들의 패착이었던 점을 반세기 전의 독일은 자신들의 승리요인으로 이용하고 있었어. 바로 이탈리아를 자신들의 동맹으로 끌어들인 것이지. 오스트리아는 이때문에 병력을 남북으로 분산시켜야했고, 가뜩이나 교통망이 부족했던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아주 치명적인 요소로 작용했지.


아무튼 이렇게 보오전쟁은 정말 싱겁게도 프러시아의 승리로 돌아갔어. 프러시아 왕 빌헬름 1세는 승리의 기쁨에 만취하여 당장 오스트리아의 땅 상당부분을 병합하고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승전행사를 개최하여 자신들의 라이벌에게 치욕을 안겨주고자 했지. 그러나 이를 막아선건 다름아닌 비스마르크였어. 먼저, 강대국들은 그동안 얕잡아봤던 프러시아가 "그래도 강대국"인 오스트리아를 그것도 단 2주만에 격파시킨 걸 보고 아연실색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합병하면 팽창의 의도로 비칠 우려가 컸지. 그렇게된다면 잘난놈 못보는 유럽놈들의 역사답게 강대국들은 분명 프러시아를 압박할 게 분명했어. 기껏 승리한 전쟁을 다시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지. 또한 비스마르크는 이미 이때부터 독일의 통일과 이에 따를 불가피한 전쟁(특히 프랑스와의)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때를 대비해서라도 오스트리아와 적대관계를 맺어서는 안된다고 계산했지. 보오전쟁은 프러시아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모두를 획득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cf) 이탈리아는 2주만에 전쟁이 종결되어 거의 아무것도 하지않은채로 롬바르디와 베네치아만 홀랑 챙겼지. 진정한 승리자


프러시아-프랑스 전쟁(보불전쟁)

보오전쟁에서 독일연합 국가들이 모두 오스트리아편을 들었다는 것은 위에서도 말했었지? 프러시아는 보오전쟁 이후 이들에게 일련의 처벌을 가했어. 먼저 북부독일의 하노버Hannover/헤세카셀Hesse-Kassel/낫소Nassau를 프러시아령으로 병합했지. 그리고 남부독일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군대와 철도에 대한 전시통제권을 획득하고, 프러시아 주도의 독일관세동맹German Customs Union을 강화하여 남부독일을 거의 자치령수준으로 통제하기에 이르지. 그런데 왜 남부독일은 합병까지 하지 않았느냐구?


바로 프랑스 때문이었어. 지난 시간에 설명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보오전쟁 이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프랑스에게 "우리가 이기면 너네한테 땅 조금 줄수도 있음"이라며 유혹했지. 그런데 중요한건, 도대체 어디의 땅을 언제 줄것인지 구체적으로 말을 안했다는 것이었지. 가뜩이나 보오전쟁이 소모전으로 흘러갈것이라는 예상도 빗나가서 짜증나 있던 프랑스는 "에이 썅 그냥 준다던 땅이나 받아먹자"며 비스마르크에게 지속적으로 영토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해. 그러나 애초에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게 땅을 떼어줄 생각이 없었어.


"우리가 줄수도 있다그랬지 언제 준다고 그랬냐"는 프러시아와 "너네가 줄것처럼 얘기했잖아"라는 프랑스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고 있었는데, 사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의 관계는 어쩔수가 없다고 생각했어. 오스트리아야 아무래도 가재는 게편이라고, 같은 독일계였기 때문에 전쟁을 한번 치룬다해도 달래기만 잘 달래주면 프러시아에 그다지 큰 원한을 살 일은 없었어. 또 러시아는 당시까지도 프러시아와 꽤나 우호관계였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만약에라도 프러시아가 독일전체를 통일하게 된다면, 그건 프랑스 바로 옆에 떡하니 거대한 통일국가가 생긴다는 이야기였단 말이지. 이탈리아 통일 과정으로 돌아가서, 왜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지원해준다고 해놓고선 이내 마음을 바꿨을까? 바로 자신들 턱밑에 통일강대국이 생기는 것을 꺼려해서 였지. 비스마르크의 계산에는, 독일통일을 위해서는 어쩔수없이 프랑스와 한번쯤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거야.


비스마르크가 남부독일을 바로 통일하지 않은 것도 이 이유에서지. 만약에라도 당장 남부독일까지 모두 합병해버린다면 프랑스는 분명 강대해진 프러시아를 견제하고 나설테지.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치룬지 채 4년이 되지 않아 그런 리스크를 부담할 생각이 없었어. 따라서 군사와 철도이용권을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했지.


룩셈부르크 위기(1867) : 그러나 프랑스의 요구는 끈질겨서, 프러시아와 프랑스 간 절충지대격이었던 룩셈부르크(당시 네덜란드령)를 달라고 생떼를 쓰기 시작했어. 얼떨결에 돌맞은 개구리꼴이 된 네덜란드는 "애들 앞에서 가오도 있다이가"하며 일단 프랑스에게 병합보다는 매각 쪽으로 설득을 했고, 거기에 교묘하게 "프러시아의 동의 하에"라는 조항을 추가했지(1867). 이래서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되는게, 아직까지도 프러시아가 땅을 떼어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던 프랑스는 당장 프러시아로 달려가 "야 너네가 동의해주면 룩셈부르크 준단다. 빨리 여기 도장 쾅 찍으랑께?"하며 계약서를 들이밀었지만, 프러시아는 이를 본체만체도 안했지. 이로 인해 프랑스의 룩셈부르크 병합은 물건너갔고, 프러시아-프랑스 감정은 상당히 악화되었어.

cf) 이후 룩셈부르크는 영국의 중재로 영세중립화된다.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1870) : 가장 직접적인 보불전쟁의 원인이었지.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였지만,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프랑스와 한판붙는데는 오랜기간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어. 그러던 중 1870년 2월, 스페인의 왕이 프러시아의 유력가문인 호헨촐레른Hohenzollern 왕가의 레오폴드Leopold 대공에게 "거 가만 앉아있는 것도 심심할 터인디, 와서 퍼뜩 스페인 왕자리나 해먹지 않으실라요?"하며 왕위자리를 갖고 유혹하기 시작해. 스페인은 1820년 스페인 혁명 당시 프랑스가 이를 진압해준 대가로 친프랑스적인 국가였는데, 이런 스페인이 어느샌가부터 프러시아에 싸바싸바를 하고있다는 건 프랑스 입장에서 상당히 위협적이었고, 이제는 대놓고 프러시아를 위협하기 시작해. 후환이 두려웠던 레오폴드 대공이 왕위제의를 거절함으로써 사건이 끝나는 듯 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를 보불전쟁의 명분으로 삼고자 마음먹지.


사실 프러시아가 먼저 스페인 왕위를 먹겠다고 나선것도 아니고, 그마저도 프러시아가 거절을 했으니 이 문제는 끝나야 맞는 거였어. 그러나 이미 룩셈부르크 위기 때 치욕을 맞본 프랑스는 프러시아 왕 빌헬름 1세에게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까지 하라며 으름장을 놓았지. 급기야 프랑스 대사가 빌헬름 1세를 찾아갔지만, 빌헬름 1세는 알현을 허락하지 않았고, 프랑스는 그야말로 모욕감과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게 됐지. 비스마르크는 이 사건을 보다 증폭시키기 위해 몰래 영국 언론 측에 정보를 흘렸는데, 영국 신문에는 "갑자기 남의 집 현관문에 찾아와서 사과하라는 미친놈과 미친놈을 내치는 국왕"이라는 식의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리게 되었어.


보불전쟁(1870) : 이렇게 다소 어이없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결국 프러시아와 프랑스는 한판 크게 맞붙게 되었지. 일단 앞서 말했듯 러시아는 프러시아와 우호관계에 있었고, 크림전쟁에서 프랑스와 적국으로 싸웠기에 프러시아 편에서 중립을 지켜주었어. 오스트리아도 한차례 프러시아에게 패전한지 채 4년이 지난 상태여서 달리 이 문제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고, 영국도 룩셈부르크를 먹으려던 프랑스의 저의를 의심하며 중립을 지켰지. 이탈리아는 통일과정에서 프랑스가 홀랑 챙겨갔던 니스와 사보이를 탈환하기 위해 다시금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게 돼. 즉, 보오전쟁에서의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지.


그러나 강대국들의 인식은 사실 보오전쟁 때와 다를바가 없었어. 프러시아 쟤네들이 어쩌다가 오스트리아는 이겼을런지 몰라도, 당시 제1의 육군국이었던 프랑스를 이길수는 없을거라는 인식이 팽배했지. 그런데 왠걸, 전쟁의 양상도 보오전쟁때와 비슷해서, 세당Sedan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정말 속수무책으로 붕괴, 급기야 나폴레옹 3세 황제가 포로로 붙잡히는 치욕 중의 치욕을 맛보아야만 했지. 파리에서는 혁명정부가 들고 일어나 제3공화정을 수립하며 프러시아군에 대해 항전하였지만, 프러시아군이 결국 파리를 점령하고 전쟁은 끝나게 돼.


(알자스-로렌 지방.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 이부분을 잘린 프랑스는 마치 남성성을 거세당한 남자의 자존심처럼 처참히 짓밟혔을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보오전쟁 때와는 다른 정책을 펼쳤는데,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유하게 나갔지만 프랑스에 대해서는 한없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어. 일단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 것은 어쩔수가 없던 일이었지. 오스트리아야 같은 독일 민족이니까 그렇다쳐도, 프랑스는 지금껏 부딪혀왔던 것도 그렇고, 여기서 봐줘봤자 고마워할 놈들이 아니라는 것이었지.

ⓐ 알자스Alsace-로렌Lorraine의 획득 : 알자스-로렌은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이야.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나오는 공간적 시간적 배경이 바로 프러시아가 알자스-로렌을 획득하던 시기야. 소설에서는 마치 독일이 나쁜 놈들처럼 그려졌는데, 이걸 읽으니 프랑스놈들이 순 나쁜놈들이었단 걸 알겠지? 아무튼 이 지역은 철광석이 풍부한 지역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혹시나라도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하게된다면, 전략적 요충지인 알자스-로렌을 일단 먹고 시작하는 것이 편할 거라고 예상했지.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에 즉위하는 빌헬름 1세-좌측에 가장 황제처럼 보이는(...) 사람-와 흰 제복을 입은 비스마르크. 원래 황제보다 눈에 띄는 인물이 없게 그려야했지만, 비스마르크의 공을 인정한 빌헬름 1세의 배려로 비스마르크를 눈에 띄게 그리게 했다고 한다.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의 능력과 재량권을 인정해준 마지막 군주)


ⓑ 프랑스에 대해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 부과 : 이건 비스마르크의 예상과는 달랐는데, 50억프랑을 갚기 위해서는 최소한 20년이 필요하다고 예상한 비스마르크의 입장과는 달리, 프랑스는 단 2년만에 지불을 완료했지. 어찌됐든 이 돈은 비스마르크가 국내정치 기반을 확보하는 정치자금으로 잘 써먹었지만말야.

ⓒ 독일 점령군의 프랑스 주둔 : 민족주의가 확산된 시기였기 때문에 외국군대가 자국영토에 주둔한다는 것은 국가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는 일이었어. 오스트리아에서는 승전행사조차도 못하게 한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에게는 얼마나 표독하게 대했는지 알수있는 대목이지.

ⓓ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황제 즉위식 : 빌헬름 1세는 다름아닌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황제(카이저)로 즉위해. 바로 프랑스가 프러시아를 억압하던 역사를 씻고, 프러시아가 프랑스에 대해 패권자로 발돋움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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